은행 손실 등으로 1년 GDP규모 2조 8,000억弗 증발<br>금리인하·국유화등 금융산업 재건정책 불구 시장 '싸늘'<br>벤처기업 증시 이탈도 가속화… 경제 앞날 갈수록 암울
| 뉴욕 월가와 쌍벽을 이뤄온 런던 금융가에 석양이 지고 있다. 영국 경제는 이번 금융위기로 1년치 국내총생산(GDP)에 달하는 자산이 줄어드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 정부는 금융업 재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아직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런던=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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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20마일(32 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왓퍼드(Watford). 인구 8만의 작은 도시지만 1년전 만해도 런던에서 몰려든 쇼핑객으로 늘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지금, 예전의 명성은 찾아볼 수 없다.
1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왓퍼드 번화가에 자리한 울워스(Woolworth)와 MK원 매장은 굳게 문이 닫혀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소매 체인점인 울워스는 매출 부진을 겪다 지난해 11월 파산하며 1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고 저가 패션업체인 MK원 역시 경쟁업체에 밀려 끝내 도태됐다.
패션업체와 백화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가운데 사람들로 붐비는 곳은 2파운드(2.8달러) 짜리 세트 메뉴를 파는 샘스치킨과 같은 패스트푸드 매장 뿐이다. 이곳을 지나던 발레리 모슬리(60)는 "상점 두 곳 중 한 곳은 문을 닫았다. 왓퍼드는 죽어가고 있다"며 아쉬워 했다.
영국인들이 지갑을 꼭꼭 닫아 걸면서 유통 업체들은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익스피리언은 최근 조사에서 "올해 말까지 소매업체의 15%인 1,600개가 사라질 것"이란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익스피리언의 소매 컨설턴트인 존 드 멜로는 "번화가의 더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런던에서는 2일부터 G20(선진ㆍ신흥 20개국) 정상회담이 열린다. 미국 워싱턴에 이어 두 번째 회담 개최지로 런던이 선정된 것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공적인 행사 개최를 위해 고든 브라운 총리를 비롯한 영국 정부는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영국은 근간 산업인 금융이 초토화되면서 2류국으로 전락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해 4분기 영국 GDP는 3분기에 비해 1.6%가 감소했다. 건설은 4.9% 감소했고 소비지출은 1%가 줄었다. 최근 발표되는 고용, 무역,주택, 산업생산 등 각종 경제 지표들엔 '수십 년 만에 최악'이라는 수식어가 떠나지 않는다.
2월 현재 실업자는 1971년 이후 최고로 치솟았다. 영국 통계국에 따르면 2월 한달간 13만8,400명이 신규로 실업수당을 신청해, 연속 실업수당 수급자가 139만 명에 이른다. 3개월 평균 실업률은 6.5%로 미국(8.1%)과 유로존(8.2%) 보다 낮지만 실제 상황은 이보다 훨씬 암울하다.
금융업을 중심으로 감원 열풍이 여전히 거세다. UBS의 이코노미스트인 아미트 카라는 "내년에 실업자가 35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마가렛 대처 전 수상 집권기 탄광노동자 파업 등으로 사회 불안이 극으로 치닫던 1984년 5월의 330만 명을 넘어서는 것이다.
제조업 경기는 수십 년 만에 최악이다. 지난 1월 제조업 생산은 한달 전에 비해 2.9%, 1년 전에 비해 12.8%가 감소했다. 3개월 연속 제조업 생산은 6.4%가 줄어 1968년 이후 가장 부진했다.
산업기반이 흔들리면서 무역 적자 규모도 급속하게 증가했다. 지난 1월 영국의 무역적자는 77억 파운드(106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시장 전문가들의 예상치를 웃도는 것이며 지난해 12월의 72억 파운드에 비해서도 커졌다.
주택 경기 역시 바닥을 모르고 침체되고 있다. 로이즈 뱅킹의 모기지부문인 핼리팩스는 지난 2월 기준 3개월 주택가격이 1년 전에 17.7%가 폭락해 26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왕립차터드연구소는 "주택 판매량은 1978년 이후 최저로 떨어졌고 올해 신규 주택건설은 1921년 이후 가장 적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 런던의 금융가인 '시티 오브 런던'은 뉴욕 월가와 함께 이번 금융 위기를 초래한 진원지다. 그런 만큼 영국 경제가 입은 피해는 막대하다. 은행부문 손실과 파운드화 폭락으로 2조 파운드(2조 8,000억 달러)에 이르는 영국인들의 재산이 증발했다. 이는 영국의 한해 국내총생산(GDP)을 능가하는 막대한 규모다.
추락하는 경제를 구출하기 위해 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도박에 가까운 극단적인 정책을 잇따라 쏟아내고 있다. 영란은행(BOE)은 지난달 5일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0.5%로 낮춘 데 이어 3개월간 750억파운드(1,050억 달러)의 화폐를 찍어내 국채를 사들이는 '양적완화'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브라운 총리 역시 초강수를 동원하고 있다. 지난 2월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에 이어 3월 초에는 로이즈뱅킹그룹을'준(準)국유화'했다. RBS에 3,000억 파운드, 로이즈에는 2,600억 파운드에 달하는 지급 보증과 함께 400억 파운드의 자금 지원을 통해 정부 지분을 95%, 77%까지 높였다.
이들 두개 은행에 대한 지급 보증과 자금지원 규모만 영국 GDP의 3분의 1에 달한다는 점을 볼 때 영국 정부가 금융산업 재건을 위해 사활을 걸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정부 정책을 바라 보는 시장의 눈은 싸늘하다.
지난달 25일 영국은 14년 만에 국채 발행에 실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국가채무관리기구(DMO)가 17억5,000만 파운드(약 25억 달러) 규모의 국채를 경매에 부쳤으나 입찰액이 16억7,000만 파운드에 그쳐 유찰됐다.
영국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구심까지 제기되고 있다. 헤지펀드 대부인 조지 소로스가 "영국이 또 다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구걸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소로스는 최근 더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영국의 문제는 은행 부문이 경제보다 규모가 크다는 것이며 영국 스스로 금융위기를 해결하려 한다면 빚더미 위에 앉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영국은 지난 1976년 IMF로 부터 39억달러를 지원 받았다. 당시 영국은 외부의 개입 없이는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정도로 이른바 '영국병'이 깊어진 상태였다.
주요 산업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었지만 노조는 무리하게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물가 상승률은 27%에 달했으며 파운드화는 폭락을 거듭했다. 그 결과는 '서유럽 최초의 IMF행'이라는 불명예였다.
영국 경제의 앞날을 더욱 암울하게 하는 것은 '경제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벤처기업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판 나스닥시장인 에임(AimㆍAlternative Investment Market)을 떠난 벤처기업이 258개사에 달했다. 상장 기업의 15% 가량이 줄면서 에임 상장사는 1,500개 밑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