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5일. 프랑스 트럭운전사 노조원들은 A6ㆍA7 등 2개 고속도로와 국도 20여곳을 봉쇄했다. 프랑스 항공관제사들도 이날 밤부터 파업에 들어가 프랑스 국내항로는 물론 유럽노선 상당수가 취소됐다. 항공관제사와 함께 지하철ㆍ우체국ㆍ전화국 공공 노조원 6만여명이 참여한 이번 파업으로 프랑스는 물론 이를 경유하는 유럽전역의 물류가 사실상 마비됐었다.
“네덜란드에서는 프랑스처럼 트럭기사들이 파업에 들어가 물류가 마비되는 일이 절대 없다.”
마리크 더 팔크 네덜란드 사회경제위원회(SER) 공보담당관은 네덜란드의 노사관계에 대해 이같이 단언했다. 네덜란드의 파업률이 유럽에서 가장 낮은 것도 노사 양측이 협의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난 80년대초 높은 실업률과 극단적인 노사대립으로 `네덜란드병`이라는 비아냥까지 받았던 이 나라는 위기와 갈등을 통해 얻은 교훈을 정치ㆍ경제ㆍ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내리고 있었다.
◇안정된 노사관계로 이뤄낸 경제성장= 네덜란드는 원래 `튤립의 나라`로 불릴 만큼 원예와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하지만 이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과 가장 낮은 실업률을 자랑하는 `작지만 강한 나라`로 탈바꿈했다.
네덜란드도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노사마찰을 겪었다. 안재용 KOTRA 암스테르담무역관 과장은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81년 경제성장이 멈추고, 실업률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11%까지 솟구쳤다”며 “물가상승률은 10%를 웃도는 등 국가경제는 파탄 일보 직전까지 몰리는데다 노사갈등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네덜란드의 노동계와 경영계는 82년 `바세나 협약`을 체결하면서, 경제 재건에 손을 맞잡기 시작했다. 노사간 현안을 협의하는 노동재단이 이 협약이후 임금인상을 최대한 자제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대신 고용을 늘리는 `일자리 나누기`가 본격화 됐다.
프라케 SER 대외협력국장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생긴 노사갈등이 바세나 협약을 통해 다시 신뢰관계를 되찾게 됐다”고 말했다. 고통분담을 노사 양측이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그 결과 실업자는 사라졌지만, 83년부터 97년 사이에 임금은 33% 오르는 데 그쳤다. 이 기간동안 독일의 임금상승률은 75%에 이르렀다.
수출입에 크게 의존하는 네덜란드는 이후 임금이 안정되면서 대외 경쟁력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경제회복을 앞당기는 효과를 거두게 됐다.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내수시장이 작은 네덜란드가 강대국 틈새에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든 것이다.
◇파트타이머가 만든 유연한 노동시장= 네덜란드는 `파트타이머의 천국`으로 불린다. 네덜란드인에게 파트타임은 이제 당연한 노동형태로 인식될 정도다.
지난 83년부터 96년까지 만들어진 일자리 100만여개 가운데 80% 정도가 파트타임 일자리였고, 풀타임 일자리는 90년 이후 증가세가 멈췄다. 현재 총고용에서 차지하는 파트타임의 비중은 유럽연합 평균의 2배 수준인 40% 안팎에 달하고 있다. 83년부터 체결된 대부분의 임단협에는 일자리를 추가로 만들 경우 파트타임 형태로 한다는 조건이 삽입됐다.
신성식 한진해운 로테르담법인 과장은 “현지 채용인들은 근무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언제든지 쉴 수 있는 파트타임을 오히려 선호하고 있다”고 전했다.
파트타임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노동시간이 급속히 단축됐다. 노동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73년 1,742시간에서 96년에는 1,374시간으로 줄어 세계에서 가장 짧은 수준에 도달했다.
파트타임노동의 활성화를 위해 네덜란드 정부는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최저임금 보장 등 파트타이머의 불이익을 제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이 결과 실업률 감소는 물론 언제든지 직업을 바꾸고 언제든지 직원을 채용할 수 있는 탄력적인 노동시장이 만들어지게 됐다.
최윤범 삼성전자 로테르담법인 차장은 “파트타이머들이 일에 대한 책임감이나 조직에 충성도가 떨어진다고만 볼 수는 없다”며 “노조가 탄력적인 노동시장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이에 협조적이라는 점은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뢰와 존중이 합의를 이끈다= 유럽의 허브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한 로테르담항도 노사간의 마찰을 협의로 풀어냈다. 임금ㆍ복지 등 주요 쟁점을 노동재단과 SER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 70년대 이후 극한 대립은 사라졌고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됐다.
유로헌 트루스트 로테르담항만청 노동담당관은 “유럽 최고 항만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사측뿐 아니라 노사가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인식을 재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세계 언론들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라고 격찬하며 21세기를 위한 모델로 주목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팔크 공보담당관은 “노동재단이나 SER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협의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신뢰, 나아가 서로가 존중하는 자세”라고 강조했다.
네덜란드를 견인하는 국가의 힘은 바로 합의문화에 있었다.
[인터뷰] 네틀렌보스 네덜란드 노동당 하원의원
"극단 아닌 합의가 사회 전체에 도움 노사 함께 염두에"
“노사 모두 사회 전체를 생각하면서 현안에 대해 협의한다. 합의가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네틀렌보스 네덜란드 노동당(PvdA) 하원의원은 네덜란드 노사관계의 기본정신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네덜란드 경제가 불황에 빠져 실업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지만, 노사문제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이 안정된 노사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라고 덧붙였다.
-노동당의 이념과 정치적 색깔을 설명해 달라.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당이 결성된지 100여년이 됐으며 지식, 수익, 노동의 균등한 분배를 이념으로 갖고 있다. 특히 지식이 다른 요소들과 함께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네덜란드의 경제ㆍ노동현안은 무엇인가.
▲몇 년전만 해도 기업들이 구인난을 겪을 정도로 활황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경제불황이 다가왔으며, 최근에는 매월 평균 6,000여명의 실업자가 발생할 만큼 심각한 실업문제를 겪고 있다.
-로테르담항의 경우 최신 겐트리크레인의 도입으로 일자리가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같이 기술발전이 고용안정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나.
▲그렇지 않다. 전문교육을 통해 최첨단 파생산업에 취업하도록 하면 근로자들에게도 임금이 올라가는 등 매력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특히 로테르담항은 최첨단 설비의 도입으로 다른 항만에 비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첨단기술의 도입과 발전은 근로자들을 바쁘게 하면 했지 실업률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같은 상황은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세계적으로 강력한 지도자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노조도 자발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정부는 사람들이 정부가 결정한 것을 따르기보다는 결정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다.
재단ㆍ사회경제협의회] 네덜란드 사회적 합의도출 양대축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글로벌 경쟁력에는 사회경제협의회(SER)와 노동재단(Labor Foundation)이 자리잡고 있다. 이 두 기관은 노사문제를 비롯한 각종 사회적 갈등을 봉합하고 치유하는 `전문의`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노동재단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지난 45년 가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간조직이다.
노사간 협의나 조정을 담당하는 이곳엔 네덜란드경영자연합(Vereniging VNO-NCW), 네덜란드 중소기업연합(MKB Nederland), 농예원예협동조합(LTO Nederland) 등 사측 대표와 네덜란드 노총(FNV), 네덜란드기독노총(CNV), 중간관리직 노련(MPH) 등에서 노측 대표가 참여하는 이사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 주요 합의사항을 결정한다. 물론 양측 대표는 조합원들과의 긴밀한 논의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결정하기 때문에 노동재단에서 합의한 내용에 대해 조합원들이 번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다른 핵심 축인 SER은 지난 50년 조직됐다.
SER은 노사 양측 대표와 함께 여왕이 임명한 고문(중립성을 띤 전문가)들로 구성돼 각종 현안에 대한 정부 자문역을 맡고있다. SER은 특히 노사 양측 대표 각각 11명과 중립고문 11명이 참석해 정확하게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중립고문들은 특히 어떤 정부기관에도 소속되지 않고 국민 전체의 이익과 입장만을 대표해 엄정한 중립성을 신임받고 있다.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