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부문 규제 혁파는 우리나라 명운 달린 문제
미국은 3000개 명예의 전당… '성공의 길' 다양화를
통계지표 아닌 국민 생활상 보고 경제정책 펼쳐야
반세기 동안 경제학을 배우고 가르친 노교수의 혜안은 날카로웠다. 문제에 대한 진단은 명쾌했고 해답에는 철학이 녹아났다.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은 몇 개의 거시경제 지표만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까.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는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현재 글로벌 경제를 보면 단순한 순환적 경기변동을 넘어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30년 앞을 바라보며 노동·공공·교육·서비스 부문 등에서의 근본적인 개혁을 결행해야만 한국 경제가 4% 정도의 장기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정창영(72·사진) 연세대 전 총장(현 삼성언론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서초구 집무실에서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비정규직·자영업자·준실업자를 합하면 취약계층이 2,000만명에 달하는 우리 현실을 참작할 때 단기적인 경기부양책만으로는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정 전 총장에게 대한민국의 현주소와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
소득 늘려 수요 살릴 빅인벤션 없어
정 전 총장은 세계 경제가 과거와 같은 높은 성장세를 이어가기는 힘들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는 "2014년 3·4분기 미국이 유가 하락 등에 힘입어 5%나 성장했지만 높은 실업률을 감안할 때 새해 성장률은 3%로 예상된다"면서 "중국 경제성장률 역시 7%대에 머물고, 특히 유로존과 일본은 1%의 저성장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가계소득이 증가하지 않는 것이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정 전 총장의 진단이다. 그는 "소비는 선진국 국내총생산(GDP)의 70%에 달하는데 미국은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 임금이 별로 늘지 않는 현상이 지속돼 중산층이 위축됐다"면서 "상대적으로 소비성향이 낮은 부유층만으로는 경제를 성장시키기 힘들고 중산층이 넓어져야 하는데 미국도 상위 1%의 소득은 빠르게 증가하지만 일반 국민은 그렇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런 추세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장기침체가 짙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 전 총장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전기·철도·내연기관의 발명은 인류의 삶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 측면에서도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파급효과를 불러일으켰다"면서 "그러나 현재는 이와 같은 '큰 발명(big inventions)'을 찾기 어렵고 자연스레 성장률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스마트폰 등 정보통신기술(ICT)이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지만 장기성장에 미치는 효과는 크지 못해 과거와 같은 성장세가 나타나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더욱이 세계 경제 침체로 기업들은 투자기회를 찾지 못해 내부유보금은 점점 불어나고 있다.
성장 엔진 마모 빠른 한국경제
한국 경제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평가는 엄중했다. 정 전 총장은 "외신은 한국이 장기적으로 총인구가 감소하면 인구학적인 붕괴(demographic collapse)에 직면해 세계적으로 무시당하는(global irrelevance)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면서 "세계 경제의 성장세 둔화뿐만 아니라 저출산·고령화라는 인구학적인 요소가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크고 깊다"고 말했다. 오는 2017년부터 우리나라의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드는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정 전 총장은 "경제성장률은 노동·자본의 투입량과 생산성 향상의 세 요인으로 결정되는데 생산요소의 투입량이 줄어들면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공급 측면뿐만 아니라 수요 측면을 놓고 볼 때도 국내 경제 기반이 취약하다는 지적도 했다. 수요 기반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일자리인데 외형적인 지표보다 실상이 더 안 좋다는 게 정 전 총장의 판단이다. 그는 "1년 미만의 임시일용직까지 포함하면 비정규직 근로자가 862만명으로 전체 임금 근로자의 절반 수준"이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정의대로 가족종사자까지 포함하면 자영업자는 720만명에 달하고 실질적 의미에서의 실업자 330만명까지 포함하면 2,0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소득이 낮아 소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평가했다. 더욱이 "높은 사교육비와 주택 관련 대출의 원리금 상환 부담으로 중산층 가구 역시 절반 이상이 적자를 나타내고 있다"면서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과도한 지출로 백화점 대신 할인점을 이용하는 게 우리 중산층의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경제시계 너무 짧아 … 큰그림 그려야"
"현재 상황에서는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리고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춰도 시장에서 돈이 돌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단기적으로 문제를 보기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차분히 찾는 것이 필요해요."
정 전 총장은 덴마크의 녹색산업을 예로 들면서 우리나라의 경제 시계(時界)를 길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이 처음 닥쳤을 때 덴마크는 '재생에너지 기반 사회'를 만드는 목표를 세우고 50년 계획을 수립했어요. 정권이 수없이 바뀌었지만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글로벌 녹색산업의 선도국가가 됐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인들은 보통 30년 앞을 내다보고 현대를 산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많은 것이 변하는 5년의 시계는 우리나라의 주요 장기과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짧다"고 지적했다. 5년마다 핵심정책이 바뀌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는 "1980년에 제1차 중소기업육성5개년계획을 시작한 후 30여년이 지났지만 별로 진전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저출산·고령화, 남북한의 재통일, 노동시장, 공공 부문, 교육개혁 및 서비스산업 육성 등 주요 과제는 최소한 10년, 길게는 30년에 걸쳐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추진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대입전형만 3,000여개 … 학교도 몰라
희망이 사라진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정 전 총장은 '교육'을 해법 가운데 하나로 제시했다. 현재 대학입시에 대해 "전형이 3,000여개나 되는데 학생·학부모·학교 그 누구도 너무나 복잡해서 제대로 모른다"면서 "결국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응할 수 없고 자연스레 개천에서 용 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99%의 고3 학생들을 패배자로 만들고 있어요." 명문대에 진학하는 학생은 고3 수험생의 1%에 불과한데 이를 위해 무한경쟁을 하는 것은 엄청난 국력낭비라고도 했다. 그는 "가진 자원이라고는 인적자원밖에 없는데 성공의 길이 제한돼 있다. 각 분야의 1인자들을 격려하는 명예의 전당이 3,000개나 되는 미국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고 되묻고는 "수많은 성공의 길을 만들지 않고서는 국제 경쟁력이 갈수록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입시제도를 바꾸는 것은 부작용만 양산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파를 초월해 교육제도 전반을 다시 구축할 수 있는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부정책 선택과 집중 중요
정부 정책이 힘을 받기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하다고 정 전 총장은 강조했다. 그는 "전선을 확대하기보다는 노동시장, 공공 부문, 서비스산업, 교육개혁 등 주요한 몇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일자리의 경우 중소기업이 열쇠를 쥐고 있다고 정 전 총장은 봤다. 그는 "10인 미만을 고용하는 영세기업에 총 취업자의 거의 절반(48%)이 종사하며 50인으로 규모를 늘리면 총 취업자의 71%가 일한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이 어려우면 서민가계가 어렵다"면서 "대기업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책임도 중소기업과의 상호보완성을 확대하면서 건전한 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낙수(trickle-down)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야 '고용증대→소득증대→내수 활성화'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정 전 총장은 정부 정책 역시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정부는 대기업들에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중소기업과의 상호보완성을 확대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비스산업의 규제 혁파는 한국 경제의 명운이 달린 문제라고 했다. 그는 "우리 경제의 한 축이 제조업이라면 다른 한 축은 서비스업인데 과거 제조업 우선 성장정책을 펴면서 규제 불균형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경제가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 바퀴가 모두 움직여야 한다"면서 "과거 제조업 위주로 성장정책을 쓸 때 제조업 중심으로 규제를 완화한 것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서비스업의 규제를 획기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숫자 뒤의 사람들 살림살이 살펴야
"1인당 GDP는 거의 매년 늘어납니다. 하지만 통계청의 사회조사를 보면 결과는 달라요. 2011년 조사에서는 자신의 경제사회적 지위를 하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45%나 됩니다. 또 우리 국민의 60% 가까이는 일생 동안 노력하더라도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지 못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자식 세대에서라도 계층이 상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43%가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정 전 총장은 정부가 몇몇 거시경제 지표에만 매몰돼 경제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는 "케인스 경제학의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경제정책 담당자는 GDP나 소비·투자·국제수지·환율·인플레이션 등 몇 개의 지표만 가지고 경제를 운용하는 데 익숙해졌다"면서 "그러나 이들 지표는 실제 당대를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제대로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보수주의자인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도 회고록 '격동의 시대'에서는 민주주의나 시장경제·세계화 등 흔히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제도조차도 국민 일반의 지속적인 지지 없이는 존속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통계청의 자료와 함께 정부 당국자가 깊이 새겨야 할 대목입니다."
정파 초월한 중립기구 만들어 통일정책 단절 막아야 조민규 기자 |
◇약력 |
/대담=이철균 경제부 차장 fusioncj@sed.co.kr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