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10년 전 유럽, 10년 후 한국


10여년 전 프랑스에서 처음 생활하게 되면서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로서는 한국과 너무 다른 유럽이 부럽고 놀라웠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슈퍼마켓 직원들의 의자였다. 슈퍼마켓에 갔더니 계산원들이 의자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다. 미국식 서비스 정신에 익숙했던 터라 노동자 파워가 센 유럽식 사회주의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하철은 1년에 한두 번 연례행사처럼 파업하기 일쑤였다. 유적지나 관광지에서 시위대를 만나고 박물관에 가면 파업 중이라고 입장료를 받지 않는 선진국의 풍경은 매우 낯설었다.


프랑스의 모든 근로자들은 한결같이 근무시간을 철저히 지켰다. 체류증을 받으러 간 파리 시청에서는 직원들의 늦은 일 처리가 기본이었고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정시 퇴근의 원칙을 중시하는 직원들이 폐관 시간 30분 전부터 관람객들을 내보냈다. 우체국 직원들은 길게 줄지어선 손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는 사람과 수다 떨 거 다 떨며 일했다.

성장없는 복지, 사회갈등 확산 초래

마치 프랑스 사회 전체가 근무시간에 최대한 일은 덜 하면서 시간을 때우려는 거대한 암묵적인 합의를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이 있듯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아등바등 일상에 쫓기지 않는 그들의 여유로운 삶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프랑스인들도 공무원이나 슈퍼 직원들의 늦은 일 처리에 불만이 있지만 기꺼이 감수했다. 파업을 연례행사로 벌이는 대중교통이지만 평상시 버스기사는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할머니가 안전하게 승차해 앉을 때까지 기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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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태도의 바탕에는 "이용자인 내 자신이 불편을 겪는다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제한하는데 동의하면 언젠가 그 제한의 목소리가 내 자신에게도 닥칠 것"이라며 나와 다른 남의 생각이나 생활방식을 존중하는 톨레랑스(tolerance)의 정신이 깔려 있다. 제러미 리프킨도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관계를, 동화보다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 삶의 질 등을 주장하는 유럽 사회에 매혹돼 저서 '유러피언 드림'(2004)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고하며 유러피언 드림이야말로 새로운 비전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유러피언 드림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리스, 스페인의 재정 위기는 호시탐탐 전세계를 경제위기의 도가니 속에 빠뜨릴 것처럼 위협하고 있다. 톨레랑스의 나라로 불리던 프랑스는 치솟는 실업률, 몰려드는 불법 이민자, 심화되는 양극화 등에 시달리며 톨레랑스의 가치를 내던지고 있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이민자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어느 누구라도 받아준 넉넉한 품을 가졌던 프랑스가 이제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며 이민자들을 차별하는 나라가 됐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장 없는 복지의 결과다. 프랑스의 이번 대통령 선거는 좌우 대결의 결과라기보다는 기존 정권에 대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분노이거나 혹은 반이민, 반세계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탈퇴 등을 주장하며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층의 불만심리를 자극한 극단주의 창궐의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10년 전 한국과 너무나 달랐던 유럽이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유럽과 비슷해지고 있다. 성장과 상관없이 복지 요구만 높은 목소리도 그렇고, 높은 실업률에 심화되는 양극화로 사회 전체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그렇다. 청년 실업은 늘어나는데 노인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해 세대 간 갈등이 증폭되는 것 역시 10년 전 유럽에서 많이 봤던 모습이다.

'유러피안 악몽' 반면교사 삼아야

하지만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먼데 '유러피언 악몽'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서는 곤란하다. 유럽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국력 손실과 소모적인 논쟁을 최소화하면서 성장과 복지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는 최선의 방안에 합의를 도출해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 해내지 못한다면 선진국에 문턱에서 우리는 길을 잃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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