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위, 신군부 언론탄압 실상 공개<br>보안사 언론사주 불러 강제로 포기각서 받아
|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이 25일 서울 국방부에서 10^27법난과 신군부의 언론통제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최흥수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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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등 강제 통·폐합 "국민에 공개 사과를" 권고
해직 언론인 취업까지 제한과거사위, 신군부 언론탄압 실상 공개
임웅재 기자 jaelim@sed.co.kr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이 25일 서울 국방부에서 10^27법난과 신군부의 언론통제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최흥수기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과거사위ㆍ위원장 이해동)는 25일 "지난 1980년 언론인을 강제 해직하고 서울경제 등 신문사ㆍ방송사ㆍ통신사들을 강제 통ㆍ폐합시킨 신군부의 행위는 국가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라며 국가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피해자와 국민에게 공개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과거사위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의 '신군부 언론통제사건' 및 '10ㆍ27 법난사건' 진상조사 결과 및 정부에 대한 권고사항을 발표했다. 이는 과거사위가 1980년 신군부가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를 동원해 언론탄압을 자행한 실상을 문건으로 재확인한 것이다.
◇보안사서 '언론사 포기각서' 문안 작성=1980년 11월 한국신문협회ㆍ한국방송협회의 자율결의 형식으로 이뤄진 언론사 강제 통ㆍ폐합은 당시 청와대 허문도 비서관이 작성한 '언론창달계획'을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강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보안사 언론반의 언론통폐합 시안도 이와 거의 비슷했다.
보안사는 포기각서 문안을 직접 작성하고 언론사주들로부터 강제로 포기각서를 받아냈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서울경제도 한국일보에 흡수돼 강제 폐간되는 아픔을 겪다가 88년 복간됐다. 당시 한국일보 및 서울경제의 사주였던 고 장강재 회장은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강제연행돼 서울경제에 대한 경영권 포기각서를 강요받았다.
그 결과 신문 28개, 방송 29개, 통신 6개 등 63개 언론기관이 신문 18개, 방송 3개, 통신 1개사로 통폐합됐다. 보안사는 언론사의 보도성향, 국가관ㆍ시국관 등 정부 시책에 대한 호응도,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여부 등을 지방지 통ㆍ폐합의 평가기준으로 정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해직언론인 취업제한=보안사가 언론반을 설치한 근거문서인 '언론조종반 운영계획'에 따르면 그해 3월 보안사 이상재 언론반장은 '안정세력 구축'을 명분으로 언론인 회유공작(K-공작) 계획을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언론사주 등과의 면담을 통해 신군부에 유리한 여론을 얻어내려 했다. '보안사령관과 언론계 사장의 면담보고' 자료에 의하면 신군부는 계엄해제를 앞두고 계엄기간 중 검열된 기사를 계엄 이후에도 게재하지 못하도록 간담회를 개최해 각서까지 받았다.
과거사위는 작성주체와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언론정화자 명단'이라는 문건도 찾아냈다. 이 문건에는 정화보류자 44명과 정화자 938명 등 982명의 이름과 등급이 손 글씨로 적혀 있다. 정화사유는 국시부정(10명), 반정부(243명), 부조리(341명), 기회주의ㆍ무능(123명), 근무태만(3명) 등이며 아무런 이유도 기재되지 않은 경우도 109명에 달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8월 정화 대상자를 A급(국시부정ㆍ제작거부 주동자 등)~C급(단순 제작거부 동조자 등)으로 나눠 문화공보부에 통보했다.
신군부는 언론인을 강제 해직시킨 데 이어 해직 언론인 711명에 대해 등급에 따라 6개월ㆍ1년ㆍ영구제한 조치를 취했다. 1982년 7월 작성된 '숙정위해 언론인'이라는 문건을 보면 보안사는 해직 언론인에 대해 계엄해제 이후에도 A급(극렬비판 인물로 순화 불가능)~D급(문제성은 있으나 자숙하면서 생계에 전념 중)으로 나눠 동향을 분석했다.
입력시간 : 2007/10/25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