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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면을 쓴 채 노래 경연을 벌이는 예능 프로그램이 화제다. 경연에서 탈락한 출연자가 복면을 벗어 던지고 정체를 드러낼 때, 그 누구도 예상 못 한 가면 뒤 얼굴에 출연진과 시청자는 환호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얼굴을 지운 뒤에야 진짜 실력을 인정받는 아이러니. 이것이야말로 가짜 얼굴, '가면'이 안기는 짜릿함이다.
연극과 뮤지컬은 이 가짜 얼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장르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선 한정된 배우가 여러 개의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다. 일인다역을 가능케 한 존재는 바로 가면. 배우는 등장인물의 특성을 살린 다양한 가면을 쓰고 나와 관객에게 '다른 캐릭터'로 손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한 명의 배우가 칼을 휘두른 자이자 그 칼에 맞아 죽은 자를 모두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그리스 연극은 살인 같은 잔인한 장면을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주지 않았다). 이 시기 배우들이 썼던 가면을 가리키는 단어가 오늘날 인간의 또 다른 인격을 일컫는 말이자 영화감독의 분신 같은 배우를 지칭하는 '페르소나'다.
배우 수가 늘어나고 분장·무대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가면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가면극을 제외하곤 많은 소품 중 하나였던 가면이 다시 공연의 상징으로 주목받은 것은 '세계 흥행 빅4 뮤지컬' 중 하나인 '오페라의 유령'을 통해서다. 1986년 초연한 이 작품엔 얼굴의 3분의 2 이상을 가리는 흰색 마스크가 등장한다. 흉측한 외모를 가면으로 가린 채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주인공 팬텀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 가면은 배우의 얼굴에 맞춰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 라이선스 공연의 경우 국내 배우의 얼굴을 본떠 영국 오리지널 팀의 디자이너에게 제작을 맡겼다. 가면 손상에 대비해 국내 소품 담당자는 별도의 복구 교육까지 받았다고.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원작(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 '팸텀'은 가면을 언어이자 의상으로 활용한다. 지난달 국내 초연한 이 작품에서 분노, 사랑, 수치심, 승리감 등 다양한 감정을 반영한 가면이 수시로 배우의 얼굴을 수놓는다. 한국 공연에 등장하는 가면은 모두 오리지널팀의 허락을 받아 국내에서 새롭게 디자인·제작한 것으로, 5,000만 원의 비용이 투입됐다고 한다. 이 밖에 뮤지컬 '프리실라'는 여장남자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만든 독특한 부분 가면이 화제를 모았다. 아이 섀도와 마스카라 등 눈 화장을 해 놓은 이 부분 가면 덕에 배우들은 분장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뮤지컬 '캣츠' 역시 사람의 얼굴과 몸에 고양이 분장을 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전신 가면을 쓴다고 할 수 있겠다.
소품으로서의 가면뿐이겠는가. 무대 위 배우는 늘 가면을 쓴다. 자신과는 또 다른 존재로서 '극 중 인물'이 되어 대본 속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가짜 얼굴로 세상의 민낯을 드러내고, 인간 내면의 진실 된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연기 예술의 위대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