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5월 19일] <1700> 화로세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 5월 19일] 화로세 권홍우 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연간 예산 120만파운드에 세입은 90만파운드. 왕정복고(1660년) 직후 찰스 2세의 살림살이다. 의회는 머리를 짜냈다. 국왕과 의회의 대립, 내란과 찰스 1세의 처형(1649), 공화정을 겪은 주요인이 건함세 징수 등을 비롯한 세금 갈등 때문 아니었던가. 부족한 세원을 마련하려던 찰스 2세와 의회는 난로에서 해답을 찾았다. 비잔틴제국에서 7세기께 처음 도입된 이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반짝했던 화로세(Hearth Tax)법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1662년 5월19일자로 통과되고 말았다. 통계학과 경제학의 선구자이자 크롬웰의 심복에서 찰스 2세의 충신으로 변신한 윌리엄 페티가 법 제정에 앞장섰다고 전해진다. 충성경쟁을 벌이던 일부 의원들도 '사람 수 세는 것보다 화로 수 파악하는 게 쉽다'며 거들었다. 막상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초기 징수액은 10만~11만5,000파운드에 머물렀다. 징세관들이 화로를 헤아리기 위해 개인 집에 들어가 반발도 샀다. 사람들이 화로를 없애고 집안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통에 화재와 사망사고도 잇따랐다. 결국 명예혁명 직후인 1689년 화로세 징수액은 21만6,000파운드까지 올라갔지만 민심을 얻으려는 윌리엄 3세와 메리 공동국왕은 세목을 없애버렸다. 영국인들은 환호했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수부족을 견디다 못한 새 국왕이 1696년 창문세를 신설했으니까. 창문세 역시 창문이 없는 기형적 주택을 양산하는 등 부작용을 빚은 끝에 1851년에야 폐지됐다. 화로세는 뜻하지 않은 유산을 남겼다. 얼마나 악착같이 걷고 기록했는지 당시의 풍부한 문헌은 주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감세를 주창했던 우리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새로운 세목이 생길지, 서민증세로 이어질지 걱정이 앞선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