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3류 서비스 산업] <5·끝> 문화대국 가로막는 한류의 그늘

생활고 문화예술인 수두룩… 콘텐츠 키우려면 사람부터 챙겨야<br>문화산업 생산유발효과 큰데 영화·기획사 불공정 계약에 사회보험 등 근로환경 열악<br>권리 보장·처우 개선 등 창작활동 지원 대책 시급

내년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제작 중인 영화‘관능의 법칙’ 촬영현장. 이 영화 제작자는 스태프의 4대보험 가입 등을 의무화한‘영화산업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했지만 아직 많은 영화 제작과정에서 이 제도가 준수되지 못하고 있다. /사진제공=명필름


# 12년차 무용수 민지혜(39ㆍ가명)씨는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초등학교 인근 발레학원에서 시간강사로 일한다. 무용단 연습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수업을 맡아 매달 50만원씩 수입이 생겼지만 최근 수강생이 줄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민씨는 "무용수들은 대체로 40대에 환갑을 맞아 나도 이제 은퇴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춤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지 걱정"이라고 말한다.

최근 한류열풍과 함께 대한민국 문화 콘텐츠 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콘텐츠 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은 척박한 현실에 생계 자체를 걱정하며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 콘텐츠 산업, 사람이 핵심이다=한류의 근간인 문화 콘텐츠 산업은 그 자체로 엄청난 경제적 부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에 비해 높은 생산유발 효과, 고용창출 효과를 자랑한다. 콘텐츠 산업의 고용 및 취업유발계수는 각각 11.79, 14.74로 제조업(6.32, 8.65)보다 훨씬 높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얼마나 우수한 인적 자산을 확보하느냐가 콘텐츠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작 문화 콘텐츠 산업을 이끄는 핵심 자산인 문화예술인들은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매우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가수 이진원(2010년 사망)씨,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2011년〃)씨 등이 생활고와 지병에 시달리다 사망한 뒤 문화예술인 처우개선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지난 2012년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창작활동 관련 월수입이 50만원 미만인 경우가 절반에 달하고 문화예술인의 고용보험ㆍ산재보험 가입률은 각각 30.5%, 27.9%에 불과했다.

특히 한류의 주역인 대중음악이나 드라마ㆍ영화ㆍ공연 등의 산업현장에선 보조출연자(엑스트라)나 스태프에 대해 적절한 처우가 이뤄지지 않아 말 그대로 '화려한 한류 스타 뒤에 가려진 예술노동자의 고통'이 심각한 상황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4~6월 보조출연자 400명을 대상으로 연소득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약 70%가 600만원 이하로 집계됐다. 5년 전부터 엑스트라로 활동해온 연기자 김진영(27ㆍ가명)씨는 "기획사에서 연락이 오면 하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영화촬영장으로 달려가다 보니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기가 힘들다"며 "아직까지는 부모님께 의지하면서 용돈도 받고 있는데 서른 넘어서까지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공정한 고용관계 시급하다=6월 연예기획사 오픈월드엔터테인먼트의 장모 대표가 성폭행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았다. 장씨가 성폭행한 연습생 3명 중 2명은 10대 미성년자이며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정식 계약을 하지 않은 연습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K팝을 필두로 한류가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정작 한류의 흐름을 이어갈 잠재적 재목들은 공정한 고용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한국연예제작자협회가 실시한 연예기획사 전수조사에 따르면 연습생의 46.2%가 무계약 상태로 '표준전속계약서'를 체결하지 못했다. 영화계 역시 이른바 '턴키계약(일괄계약 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주요 스태프가 영화사와 '통계약'을 맺은 뒤 받은 금액을 그 이하 스태프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일부 스태프의 급여가 최저임금 기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문제점도 빈번히 제기됐다. 실제로 제작비 120억원이 투입된 영화에서 막내 스태프가 받았던 임금은 60만원이 전부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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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개정된 공정위 표준전속계약서에는 기획사가 아동ㆍ청소년 연예인의 신체적ㆍ정신적 건강, 학습권, 인격권 등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지만 제대로 지키는 곳은 손에 꼽힐 정도다. 황동섭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이사는 "연예기획사등록제를 통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등록제 시행시 필요한 사항을 의무화해 연예산업과 기획사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도정착 통해 예술가를 보호하자=전문가들은 문화예술인의 권리보장을 위해 마련된 제도가 현장에서 잘 지켜지도록 관리ㆍ감독을 철저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 문화산업 현장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감지되는 점은 고무적이다. 영화계에서는 4월 한국영화산업 노사정 대표가 '한국영화산업 노사정 이행협약'을 체결해 노사단체협약에 따른 표준근로계약서 이행을 다짐했다. 7월에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구매) 표준계약서'와 '대중문화예술인(가수ㆍ배우) 방송출연 표준계약서' 제정안이 발표되면서 방송계의 불공정관행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발판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내년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제작이 한창인 영화 '국제시장(JK필름)'과 '관능의 법칙(명필름)'팀은 스태프의 4대보험 가입, 초과근무수당 지급 등을 의무화한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를 법으로 보호해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예술인복지법이 시행됐다. 하지만 예술인 활동증명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제도정착에 어려움이 많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문제갑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정책위원회 의장은 "창작자ㆍ실연자ㆍ스태프를 일괄적으로 방송소득이나 과거 3년간 출연작품 등의 기준에 근거해 예술인으로 지정하고 있지만 최근 실적이 없는 예술인은 아예 대상에서 배제될 수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노동렬 성신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문화 콘텐츠 산업이 선순환 구조로 갈 수 있도록 시장 자체의 기능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 전제조건이 (현재의 불공정한) 계약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라며 "문화산업에서도 분야별ㆍ직종별ㆍ직급별로 세분화된 계약체결이 이뤄져야 문화예술인 모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 교수는 "문화계 노동시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면 현재 한류를 떠받치고 있는 동력 자체를 잃게 된다"면서 "열악한 노동환경을 감내하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등 문화 선진국처럼 차세대 문화예술인을 키우는 분위기가 정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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