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시부야 교차로. 일본의 최첨단 패션 트렌드를 선도한다는 이곳 어디서나 ‘한국’을 읽을 수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삼성 네온사인과 함께 전철역 앞 대형 전광판에는 일본에서 방영 중인 KBS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예고편이 흘러나온다. 패션 상가 ‘시부야 109’ 외벽에는 최지우의 광고 간판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배트맨 비긴즈’ ‘스타워즈 에피소드3’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극장가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개봉작 ‘그녀를 믿지 마세요’가 일본 전역에서 지난달 28일 개봉해 관객을 유혹하고 있다. 두달 전 DVD로 발매된 ‘올드 보이’와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여전히 도쿄 DVD 매장의 베스트셀러 코너를 장식하고 있다.
모두 ‘한류’에 취해 있고 ‘한류’에 들떠 있다. 연예기획사와 제작사의 난리 법석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수십억원의 TV 드라마를 눈 하나 깜짝 않고 만들면서 “일본만 열리면 된다”는 주문만을 되뇌고 있다. 이들에게 ‘한류’는 눈먼 돈을 끌어오는 도깨비방망이다.
‘한류시대’에 생뚱 맞은(?) 말이겠지만 이제는 들뜬 흥분보다는 차분한 눈으로 일본을 바라볼 때다. 일본인 모두 ‘욘사마’에 열광하고 일본 전체가 한국 광풍에 휩싸인 듯하지만 그들에게 한류는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자 감탄이요, 또 하나의 새로운 즐길 거리다.
일본 최대 음반점인 HMV에는 수백장의 한국 음반이 진열돼 있다. 그러나 그 옆에는 꼭 그만큼의 동남아시아 음악과 중동 음악, 아프리카 민속음악이 있다. 도쿄에서 가장 큰 비디오 대여점 ‘츠타야’에는 ‘겨울연가’ DVD와 함께 지난 1890년대 프랑스 무성영화 시리즈와 1910년대 바이마르공화국 영화가 있다. 전세계 문화와 살아 숨 쉬는 다양성이 오늘날 일본을 경쟁력 있는 문화 선진국으로 키운 원동력이다.
일본문화는 한류에 정복당하지도, 무릎 꿇지도 않았다. 또 하나의 자양분을 먹으며 쑥쑥 커가고 있다. 거품 유행이 아닌 그들의 왕성한 문화 식욕을 부러워하는 것은 비단 기자만의 사대주의는 아닐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