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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 풀 꺾인 서울 명동 유네스코거리. 한 중국인 관광객이 바쁘게 고개를 돌리며 스마트폰과 거리에 즐비한 노점상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더니 한 자장면 노점상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어? 여기야! 여기 찾았어!”. 엄마, 여동생과 함께 노점 앞으로 직행한 그는 자장면 두 그릇을 시킨 후 아르바이트생과 인증샷을 찍고 명동 거리를 향해서도 쉴새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자장면 노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닭꼬치를 파는 곳에는 5~6명이 줄을 서서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한 중국인 남성. 지나가다 말고 줄을 서서 닭꼬치를 하나 사 먹고는 맛있었는지 곧 어머니인 듯한 여성을 데리고 오더니 3개를 더 샀다. 그는 ”중국 대사관에서 내려오다가 이 노점을 봤는데 블로그에서 본 것 같아서 사게 됐다“며 ”바비큐 소스 맛이 가장 맛있다“고 말했다.
쇼핑 메카 명동 거리의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다. 1~2년 전까지만 해도 스카프 등 잡화, 액세서리, 가방 등이 패션용품이 길거리를 장악했지만 최근 관광객이 늘면서 서울 남대문시장이나 광장시장 못지 않은 먹자골목으로 변신 중이다.
▲쇼핑천국서 먹자골목으로=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건너편부터 신한은행 명동금융센터까지 이어지는 200m 남짓의 명동 유네스코길이 항상 길거리 부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햇볕이 따가운 한낮에는 시원한 사탕수수·수박주스나 여성용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상만 드문드문 있을 뿐 예상했던 북적거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후 4시. 갑자기 거리가 분주해졌다. 음식 등 각종 도구를 실은 이동식 매장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명동은 순식간에 길거리 음식 경연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여느 분식점에서나 즐길 수 있었던 튀김, 서울 광장시장에서 맛보았던 잡채무침, 고속도로 휴게소의 단골 메뉴 ‘핫바’, 뜨거운 새우튀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회오리 감자칩’ 등등…. 부담 없이 간단히 맛볼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은 말 그대로 없는 것 빼놓고는 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왜 하필이면 오후 4시일까. 좀 더 일찍 나오면 더 많이 팔 수 있을텐데…. 한 노점상이 의문을 풀어줬다. “오후 4시 이전에는 날이 더워서 사람들이 음식을 잘 사 먹지 않아. 시원한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 먹지 누가 땀 뻘뻘 흘리면서 먹으려 하겠어. 일찍 나와봐야 힘만 들고 덥기만 할 뿐이지.”
▲노점 고객 10명중 7명은 중국인= 더 큰 이유는 중국인 관광객(요우커)에 있었다. 한국관광공사와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올 들어 4월까지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0% 가까이 증가한 약 158만명. 이중 86%가 명동을 찾았다. 한국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은 거리가 된 셈이다.
그럼에도 한낮의 명동에서 요우커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 고공 등 주요 관광지에 머물고 있기 때문. 단체관광을 마친 중국인들이 야식거리를 찾아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 바로 오후 4시 이후다.
이날도 마찬가지. 한낮의 뜨거움이 한 풀 꺾이면서 거리는 ‘뚜오샤오지엔(얼마에요)’‘하오츠(맛있다)’ 같이 높은 억양의 중국말로 가득 찼다. ‘하오츠더 한궈더 쟈쟝미엔(맛있는 한국 자장면이오)’‘ 하오츠더 짜시아, 하오츠(맛있는 새우튀김, 맛있어요)’. 노점상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이동 매장 앞에도 길거리 음식을 맛보려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물론 상당수가 중국인. 오후 5시에 문을 연 한 자장면 노점을 1시간 동안 지켜본 결과 손님 10명 중 7명꼴로 중국인 관광객이 찾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구매 방식. 일단 한 명이 음식을 먹어본 후 맛있으면 주변 다른 사람에게도 권한다. 중국인 1명을 끌어들이면 3~4명분의 음식을 팔 수 있는 셈이다. 닭꼬치 노점 주인은 “중국인 정말 잘 먹는다”며 “맛있는 것이 있으면 꼭 아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 또 사 먹는다”고 귀띔했다.
▲‘별그대’에 반해 오고… 성형수술 후 간식 사고…= 중국인 관광객이 이토록 명동의 길거리 음식에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중국 심천에서 왔다는 관광객 리우씬의 설명은 간단했다. 한국 드라마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드라마 ‘별그대(별에서 온 그대)’를 보던 중 주인공이 자장면 먹는 장면을 보면 한국에 와서 꼭 먹어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리우씬은 “드라마에 나왔던 ‘치맥(치킨+맥주)’도 어제 먹었다”고 말하곤 음식 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라마 한류의 위력은 거리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하나은행 명동영업부를 지나던 한 중국인은 건물에 붙은 김수현 포스터를 가리키며 “‘별에서 온 그대’ 그 교수다. 천송이가 친구네 가게에서 자장면 시켜 먹었지?”라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중국인 관광객의 또 다른 특징은 남의 시선에 무관심하다는 점. 실제로 명동에 머무는 동안 성형수술을 마치고 반창고를 붙이거나 마스크, 붕대를 칭칭 감은 채 거리를 활보하거나 잡채나 튀김과 같은 음식을 사는 중국인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광저우에서 성형수술을 한국을 찾았다는 홍 모양은 “명동 병원에서 두루두루(?) 수술을 받은 후 휴식을 취하면서 자장면 등 간식을 포장해 가지고 가 먹는다”며 “(수술후)전지현처럼 예쁜 코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자리를 떴다.
▲통역 알바 등장 ‘노점도 국제화’= 중국인 고객이 급증하자 통역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노점상도 크게 늘었다. 간단한 회화만으로도 사고 파는 데 문제가 없지만 눈길을 끌고 친근감을 나타내기 위해선 중국어를 구사하는 유학생이나 현지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새우튀김 노점에서 통역을 하던 대만인 아르바이트생은 “1년 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와 모 대학 일본어과에 재학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일본인들은 잘 사 먹지 않아 중국어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먹는 장사가 워낙 잘되다 보니 다른 지역에서 명동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홍대, 북촌에서 장사를 하다 유네스코 거리로 왔다는 한 노점상은 “한국 드라마, K-팝 등 한류 열풍으로 한국을 찾는 중국인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며 “특히 이들은 씀씀이가 크고 먹을 것을 좋아해 장사할 맛이 난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연승기자 yeonvic 이지윤기자 zhi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