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경험한 질병의 종류에는 종양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너무도 치명적이어서 미세한 접촉만으로도 염증과 함께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중략) 나는 있는 그대로, 그대의 상태를 충실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진실된 모든 것을 감춰버리는 그 질병을 에워싸고 있는 베일의 모퉁이를 들추고자 한다.' 1886년, 필리핀 작가이자 민족주의 혁명가인 호세 리살은 이 소설을 유럽에서 출간하며 조국을 향해 헌사를 썼다. 식민지 필리핀의 통치자로 군림하던 위선적인 스페인 신부들과 그에 붙어 민중을 억압하는 데 앞장선 군인, 관료, 그리고 그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소설을 통해 식민 지배의 착취 구조와 가톨릭 교회의 위선적이며 오만한 태도를 가감 없이 보여준 이 책은 필리핀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불을 댕겼다. '나를 만지지 말라'(Noli Me Tangere)는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등장하는 구절로,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 말이다. 저자는 헌사에서 이 소설을 쓴 이유를 '식민 지배하의 필리핀 민중의 고통은 만질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종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안과의사이기도 했는데, 눈꺼풀에 생기는 암을 'Noli Me Tangere'라고 부르기도 했다. 누구도 직시하지 못하는 식민지 현실을 가장 먼저 폭로하기 위해 저자는 이 다의적인 제목을 고르지 않았을까. 글을 통해 필리핀의 아픈 종양에 기꺼이 손을 대 치유하려 했던 저자는 민중을 깨어나게 하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들어냈지만, 스페인 식민 당국에게 추방당하고 처형까지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소설은 스페인의 식민 지배가 심해지던 필리핀 마닐라의 차이나타운 비논도를 배경으로 계몽을 통한 개혁을 꿈꾸는 청년 이베라, 이베라와 대립하는 다마소 신부, 고통받는 필리핀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른 신비로운 인물 엘리아스 등을 등장시켜 당시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특히 책은 대놓고 성직자에게 적대적이며, 당시 필리핀에 있던 스페인 성직자에 대한 반감을 나타낸다. '당신은 신께서 살인자 등의 범죄자를, 비밀도 지키지 못하는 신부에게 단지 고해성사를 했다는 이유로 용서해준다는 사실을 믿으세요? 지옥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하는 고해성사는 또 어떻고요. 이것은 참회라기보다는 단순히 후회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이베라 아버지의 대사 中) 저자의 경험이 녹아든, 적나라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국 역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이룬 국가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1만 2,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