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데스크칼럼] 무너져 내리는 공직사회

시라큐스대학은 1870년 개교한 미 동부지역 명문대 가운데 하나다. 우연히도 우리나라 경제관료 인맥에서 상당수 인사들이 이 대학 출신이다.외환위기 당시 경제사령탑을 맡아 지금은 피곤한 처지가 된 강경식 전부총리, 김인호 전 청와대경제수석이 시라큐스대 행정학 석사출신이다. 김영태 전 산업은행총재, 박유광 전 고속철도공단이사장도 같은 대학 동문이다. 옛 기획원 OB관료들은 시라큐스대와 어떤 인연이 있을까. 이 의문은 쉽게 풀린다. 지난 73,74년까지 미국의 AID 원조자금 항목에 후진국 공무원들의 교육지원 프로그램이 있었다. 기획원에서 촉망받던 엘리트들은 이 자금을 받아 당시로선 귀한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 이때 자금 제공처인 미 국무부가 행정학 지원자는 시라큐스대(멕스웰스쿨)를, 경제학 지원자는 벤터빌트대를 각각 추천했다고 한다. 고 서석준 부총리와 정재석 부총리가 밴더빌트대 석사과정을 마친 것도 이 자금의 덕분이었다. 형편이 나아지면서 공무원들의 해외연수는 점차 국비나 국내외 공익재단의 지원금으로 바뀐다. 재정경제부에선 매년 최고 4명까지 국비유학을 떠날 수 있다. 풀브라이트, 일본 게이오대, 한영재단, IBRD기금 등을 합치면 해마다 서기관·사무관급에서 10명 안팎이 재충전 기회를 얻고 있다. 현재 재경부의 사무관이상 400여명 가운데 박사 학위 취득자가 40여명, 석사급은 90여명에 이른다. 유학기간중 지급된 봉급까지 포함할 경우 학위 취득을 위해 1인당 줄잡아 수억원씩 세금 또는 공익자금을 쏟아부은 셈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양성한 인재들이 최근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다. 외견상 「매우 잘 나가던」 친구들이 느닷없이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물론 공무원이 옷벗고 나가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공무원 수를 줄이는 데 도움될 게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공직사회 동향은 아무래도 심상치않다. 경제부처는 위험수위에 근접한 느낌이다. 경제부처 경력중 최상급으로 꼽히는 청와대 경제수석실, 재경부 경제정책국·세제실, 금감위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산업자원부 통상정책실 등에서 한가락씩 하던 서기관급들이 재벌그룹·증권사·법무법인 등으로 줄줄이 뛰쳐나가고 있다. 한 서기관은 그냥 공무원 생활이 싫어서 나갈 곳도 정하지 않고 사표부터 던졌다고 한다. 모그룹에 진출한 전직 고위관료는 『나도 데려가 달라』는 현역 후배들의 전화를 여러번 받고 허탈해 하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고보니 지난해만해도 경제부처 서기관급이면 경력을 불문코 이사를 달아주며 받아들이던 재벌그룹들도 이젠 학위소지 여부, 주요 근무부서 등을 꼼꼼히 따지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직업 선택의 자유에 대해선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박봉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거액 연봉에 자리를 옮기는 것을 시비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일각의 지적처럼 나간 친구들도 우수하나 고시 동기들에 비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자구책을 택한 사례가 많다는 분석도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작지만 강한」 정부를 지향하며 정부개혁을 촉구한 배경은 소수정예의 직업공무원 군(群)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국가발전을 위해 소신껏 능력을 펼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옛날엔 외국의 원조자금, 요즘엔 국가예산을 들여 양성한 전문인력들이 훌훌 털고 가버리는 반면, 정작 줄여야 할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헌법상 신분보장을 내세워 「철밥통」에서 온존한다면 이건 뭔가 이상한 일이다. 이러다간 수재들은 뉴욕 월가로 몰리고 둔재들만 워싱턴 관가에 떨어져 정부가 민간에 질질 끌려다니는 미국 행정부의 사례가 우리 발등에 닥칠 지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도 우리나라는 우수한 인재들이 국가장래를 위해 해결해 줘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불균형 압축성장을 지속한 경제는 재벌체제의 고착화, 기술개발 부진 등 정부가 손대야 할 부분이 널려있다. 또 내각제 등 정치권력의 잦은 변동을 앞두고 국정수행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우수한 공무원 조직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더욱이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까지 생각하면 적어도 앞으로 한두세대 이상은 엘리트들이 자부심을 갖고 정부에서 활약하도록 국가적 배려가 필요하다. 이달 하순께 출범할 중앙인사위원회는 그 첫 과제로 국가가 양성한 전문인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전 중앙부처를 대상으로 어느 부서에 어떤 전문인력이 모자라고 넘치는 지 파악해 부처간 인사교류까지 단행한 뒤에야 비로소 민간 수혈을 추진해야 한다. 어렵게 키운 인재들이 민간으로 달아나도록 제도적으로 방치하는 것은 비용-편익의 균형이라는 경제원리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SKRYU@SED.CO.KR 柳晳基(정경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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