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문인 서화전' 등 기획… '산학협력'으로 호평·완판 행진
대중성 낮은 '최순우 전집' 발간… '무량수전 배흘림… ' 열풍도 이끌어
다른 화랑은 철수하는 中 진출… 10년 내다보고 미술한류 심을 것
학고재갤러리와 도서출판 학고재의 설립자인 우찬규(사진) 회장은 몇 년 전 미술경매에서 고서화 한 점을 낙찰받았다. 작자 미상의 작품이라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어 경합도 없었다. 그림을 받아든 우 회장은 빙긋이 웃었다. 화가의 서명에 해당하는 '낙관'이 없는 작품으로 나왔으나 눈 밝은 그의 눈에는 '자화상'으로도 유명한 공재 윤두서(1668~1715)의 것이 분명했다. "내 눈에는 윤두서의 인장이 딱 보이던데 무(無)낙관 작품이라며 10분의1 가격도 안되는 단돈 몇 백만원에 내놓았더라고요."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수작을 찾았다'며 그의 선택에 찬사를 더했다. 이처럼 우 회장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흥할 자리, 성공할 작가, 저평가된 작품을 먼저 알아보는 선구안을 가졌다. 오죽했으면 미술계에서는 '학고재 따라가면 망하지는 않는다'는 속설이 돈다.
8세에 부친을 여읜 우 회장은 가세가 기울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일찍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한의원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업무를 위해 한문공부를 해야 했고 서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한학자 고당 김충호 선생이 강의한 '소학(小學)' 수업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주자가 쓴 '소학'의 첫 서문은 '원형이정(元亨利貞) 천도지상(天道之常) 인의예지(仁義禮智) 인성지강(人性之綱)', 즉 세상사 순환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인의예지가 사람 성품의 기본이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나에게 이렇게 좋은 학문을 접할 행운이 생겼다는 그때의 기쁨과 가르침이 평생 세상살이에 도움이 됐어요. 그러면서 한학을 시작했고 '주역'도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세상과 시대의 흐름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 '주역'에 따르면 음(陰)이 많으면 양(陽)이 귀하고, 양이 융성할 시기에는 음이 귀하다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려 드는 과열시장에서는 팔아야 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얼른 사 두는 게 중요합니다."
우 회장이 '주역'에서 터득한 역발상의 경영원칙이다. 그가 지난 1988년 인사동 10평 남짓한 자리에 고미술 전문 '학고재' 화랑을 열 당시는 서구발 현대미술이 대세였다. 고미술 전문화랑을 표방한 것은 학고재가 유일했다. 고서화에 안목 높은 스승에게서 고미술을 배웠고 이를 통해 다른 방식의 한학 실천이 가능하겠다는 결심이 섰기에 옛것을 익혀 새것을 만든다는 '학고창신(學古創新)'의 뜻을 화랑 이름에 담았다.
"1980년대 말 우리 미술시장은 서양 현대미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제 이치로 보건대 남이 하는 것만 좇으면 1등은 할 수 없으니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영역을 먼저 개척해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학고재는 유홍준·이태호 교수의 도움을 받아 '19세기 문인들의 서화전'으로 개관전을 열었습니다. 학자와 상업화랑이 연계한 '산학협력'의 전시는 처음이었을 거예요. 화랑은 작품 발굴에 민첩하니 이를 학자들이 연구할 자료로 제공함으로써 유기적으로 협력해야만 미술계 전체가 상생하고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뒤이은 '19세기 이후 구한말 그림전',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자문한 '무낙관 회화전' 등 기획하는 전시마다 언론과 학계의 호평이 이어졌고 컬렉터들도 '완판'으로 호응했다.
도서출판 학고재의 경영도 마찬가지로 '가지 않은 길'을 적극적으로 개척함으로써 고유 영역을 확립했다. 젊은 시절 동화출판공사에서 한문 교과서 제작에 참여했던 우 회장은 우연히 서가에서 뽑아든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글에 감동해 출판사 경영의 꿈을 품었다. 1991년 출판사 등록을 한 그는 어느 날 "최순우 선생이 타계한 지 수년이 되도록 전집(全集)도 못 만들었다"는 지인의 한탄을 듣고는 책을 내고 싶다고 제안했다. 학문적 가치는 높으나 대중성 낮은 '최순우 전집'을 신생 출판사가 출간하는 것을 두고 많은 사람이 '무모한 도전'이라 했다.
"1995년에 '최순우 전집'이 나왔는데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습니다. 첫 책을 낸 작은 출판사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곳에서 행사를 연 것은 '좋은 책' 덕분이었죠. 당대 문화계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였던 그날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후 일반인들이 읽기 쉬운 글과 미문(美文)을 뽑아내 엮은 것이 바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입니다. 50만부 이상 팔린 책이죠. 지금도 첫 인사, 첫 만남의 자리에는 꼭 이 책을 갖고 나갈 정도로 애착이 남다릅니다."
'역발상 창조경영'은 초지일관이었다. 인사동 시절 당시 민정당사 맞은편 건물이 잦은 집회·시위로 헐값에 나온 것을 사들여 첫 사옥을 마련했다. 현재의 삼청로 자리도 청와대 인근이라 통행 제약이 있고 기무사 옆이라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땅이었다. 그러나 우 회장은 경복궁이 앞에 있고 가로수가 아름다워 화랑하기 나쁘지 않겠다 판단해 1996년 한옥을 지어 이전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개관과 함께 삼청로 이 지역은 한국 미술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이어 학고재는 지난해 말 상하이 지점을 열었다. 세계 미술시장을 겨냥했다. 한국 화랑들이 잇달아 베이징·상하이에 진출할 때는 꿈적 않던 학고재가 오히려 중국 분점 철수 분위기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상하이 진출을 선언한 것은 의외였다.
"미술시장의 역사는 항상 경제중심지를 따라갑니다. 과거 유럽의 파리와 런던, 미국의 뉴욕이 그랬죠. 지금은 세계 경제의 축이 아시아로 옮겨왔고 상하이가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중심 도시인데 미술시장의 규모는 베이징보다 못하더라고요. 오히려 베이징은 그 과열 분위기가 좀 식어가는 반면 상하이는 이제 불이 지펴지는 상황입니다. 지금도 주요 사립미술관이 속속 생겨나고 있어 앞으로 10년 후는 상하이가 미술 중심지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학고재는 상하이 예술특구 모간산루 50호(M50) 중심부에 상업화랑 중 두 번째인 233㎡ 규모로 전시장을 열었다. 상하이의 연간 미술시장 규모는 51억위안(약 9,000억원)이며 올해만도 국제 아트페어가 6개나 신설되는 등 베이징·홍콩 미술시장의 아성을 추격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미술품 거래시 판매액의 35%를 과세하지만 상하이 자유무역지구 출범과 함께 학고재는 면세 혜택까지 누리고 있다. 현지에서도 미술사학자들과 협력전시를 기획하고 작품 판매도 미술관에 우선순위를 두는 등 학고재가 펼치는 '미술한류' 전략은 공공기관이나 정부가 주도했어야 할 일들이다.
"상하이에서는 현지 화랑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 한국 작가와 서양 주요 작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음달 개막하는 백남준 전시는 벌써 관심이 뜨거워요. 이를 시작으로 국내 원로급부터 주요 작가를 체계적으로 전시하면서 한국미술과 학고재를 중국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항저우 삼상당대미술관과 공동주최한 한국 현대미술전처럼 중국 내 미술관과 협력해 한국 작가 개인전 또는 그룹전을 연 1회 이상 추진할 계획입니다. 미술의 사회적 기능을 고려한다면 개인의 밀실보다 미술관·박물관에서 대중에게 공개돼 공감을 얻어내야 하기에 가급적 우리 작품이 미술관 소장품으로 뽑혀가도록 노력하고요. 한두 점 판매에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걸어놓고 즐기다 보면 안목도 더 쌓이고 값은 그에 걸맞게 오르기 마련이지요."
남다른 '선구안'… 강익중·이용백·윤석남 등 거쳐가 ■ 학고재가 발굴한 작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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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