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만년 전 일어난 농업혁명은 인류에게 정착생활을 선물했다. 많은 사람들은 같은 장소에서 농사를 지으며 일생 동안 가족들과 경제적 사회적 공동체로 함께 살았다. 근처에 정착해 사는 이웃들과 때때로 다투기도 하지만 가족처럼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하고 미운 정 고운 정을 나누는 지역공동체로 이웃사촌이 됐다.
그러나 농업사회는 농산물과 토지를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었고 계급은 조선시대의 양반제도나 유럽의 귀족제도와 같이 신분으로 고착됐다. 이와 같은 신분사회에서는 가족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또 힘이 많이 드는 농사일과 계속되는 전쟁으로 남성우위의 사회가 형성됐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성인 남성을 중심에 두고 그와의 가족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을 인식했다. 즉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내, 누구의 부모와 같은 방식이다.
이러한 상황은 약 250년 전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바뀌게 됐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의 직장으로 몰려들었고 가정과 직장이 분리되면서 다른 사람의 가족을 알기 어려워졌다. 20년 내지 30년 동안 같은 직장에서 일한 동료의 가족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가족관계에 관심 갖는 것을 점점 불편해했다. 사생활 보호가 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공동체와 이웃사촌이 사라졌다. 직장에서는 가계보다 개인의 능력이 중시됐고 신분제도는 폐지됐다. 이제 사람들은 가족관계가 아닌 직업과 직장의 지위로 다른 사람을 인식한다. 즉 김 사장, 이 변호사, 박 상무 하는 식이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사생활을 선물했다.
한편 교통통신의 발달로 사람들의 업무상 이해관계는 확대됐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많아졌고 교류 범위는 전 세계로 확대됐다. 그러나 업무상의 관계로 만난 사람들은 업무가 끝나면 대부분 만남도 끝이 난다. 가족관계도 달라졌다.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가족과 헤어지는 연습을 시작해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면 부모 곁을 떠난다. 아내는 남편이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그리고 인간관계는 어떤지 잘 알지 못한다. 직장에서 은퇴한 부부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으로 원만한 관계 형성에 실패하면 어려움에 처하거나 황혼이혼으로 이어질 수 있다. 1인 가구가 크게 늘어나고 홀로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고독사(孤獨死)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제 가족은 자녀를 낳고 키우는 생물학적 욕망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 수행하고 개인으로 분할돼 해체되고 있다. 현대인은 군중 속에 자신만의 성(城)을 짓고 그 안에서 외롭고 고독해지고 있다.
인류는 산업혁명으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농업혁명으로 얻은 것들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다. 이미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얻는 것에 도취돼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현대인의 좌표(座標)는 어디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