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3월 19일] 우리들의 일그러진 법관

‘감히 짐에게 패소판결을 내리다니, 판결을 취소하라.’ 영국 국왕 제임스 1세의 위압에 판사들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단 한 사람만큼은 달랐다. 대법관 에드워드 코크는 ‘법관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라고 버텼다. 결국 그는 파면되고 말았다. 1606년 영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단초는 한 주교의 국왕을 상대로 한 소송.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골치 아픈 소송에 국왕은 혐의를 부인하며 재판을 연기하라는 편지를 법원에 보냈다. 대법관 코크는 ‘왕의 편지와 요구는 불법’이라고 묵살하며 왕에게 패소판결을 내렸다. 소신 판결과 국왕의 분노로 파면됐으나 코크는 ‘영국법의 수호자’로 역사에 기억되고 있다. 코크는 미국 독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1215년에 마련된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규정된 자유민의 권리를 근대적 사유재산권 보호로 해석한 저술 ‘영국법 제요’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전파돼 영국의 간섭과 ‘대표권 없는 세금 부과’에 반발하는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소신판결 대명사 코크·마셜
‘영국법 제요의 문맥상 실수마저도 자연법의 일부’라고 경탄했다던 미국에서도 코크에 버금가는 법관이 나왔다. 국무장관을 지내다 1801년 대법원장에 임명돼 죽을 때까지 34년간 자리를 지킨 존 마셜이다. ‘최고의 대법원장’으로 존경받는 마셜이지만 법관으로의 전직할 때는 비난받았다. 선거에 패해 대권과 의회권력을 야당에 넘겨주게 된 애덤스 대통령이 사법부만큼은 지키겠다며 임기만료 전에 다급하게 임명장을 남발한 이른바 ‘한밤중의 법관들(midnight judges)’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꼼수로 임명된 마셜 대법원장은 1803년 미묘한 소송을 맡았다. 역시 한밤중에 임명된 법관 하나가 새 정부의 국무장관에 의해 법적 절차 미비를 이유로 임용을 거부 당하자 제기한 송사에서 마셜은 원고 패소판결을 이끌었다. 자신의 당에 불리한 판결을 내린 것이다. 마셜은 이 재판을 통해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이라도 대법원이 위헌으로 판단하면 무효’라는 판례를 남겨 미국의 권력구조에 ‘사법부의 우위’, ‘법의 지배’라는 원칙을 심었다. 코크와 마셜은 시장경제의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코크는 의과대학의 중세 길드적 독점권을 타파하고 마셜은 증기선의 아버지 풀턴이 보장받았던 허드슨강 독점운항권을 부인해 자유경쟁의 불을 당겼다. 젊은판사들에 '용기' 희망보여
코크와 마셜은 권력과 권위ㆍ코드에 얽매이지 않고 독점과 기득권 대신 자유경쟁을 옹호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영국이 국왕 처형과 공화정ㆍ왕정복고ㆍ명예혁명의 와중에서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고 신생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비결이 여기에 있다. 건강한 법과 법관은 강한 경제를 이끈다. 믿고 싶지 않지만 한 대법관이 촛불시위 관련 재판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대법원이 안건을 공직자윤리위원회에 넘겼다니 상당 부분 사실로 보인다. 젊은 판사들의 말처럼 ‘평소에는 그렇지 않던 분이 그 때는 집요’했던 이유가 정치권의 질타 때문이라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코크와 마셜과는 정반대다. 그럼에도 희망이 보인다. 부당한 외압을 밝히고 나선 젊은 판사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그저 그렇고 그런 구조’ 속에 함몰되고 말았을 이 사건이 표면화됨으로써 법치에 보다 다가서게 됐다고 믿는다. 이문열의 자전적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급장 엄석대의 독재 권력은 기억 너머로 사라졌지만 6학년 교실에 있었던 친구들 중 최소한 두 명은 현실에서 성공했다. 하나는 밀리언셀러 소설가로 자리잡고 다른 하나는 경제부처 장관에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지냈다. 젊은 법관들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법관’을 뛰어넘기를 바란다. 코크나 마셜과 견줄 수 있는 위대한 법관을 우리 땅에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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