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주체화’(subjectification)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정의가 제법 난해하다. “누군가가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과 행동 속에서 그의 존재가 드러남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철수는 영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영희가 좋아할 만한 것을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다 보면 철수의 삶 속에 영희의 모습이 심어진다. 일종의 동화 현상인 셈이다. 푸코의 정의에 따르면 이 경우 영희는 철수를 주체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힘을 어떻게 행사했을까. 강압(coercion)이 주된 방식이었다. 그러고 보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철칙이 버젓이 통용되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 당시의 지배계층은 피지배 계층을 억눌렀고 그들에게서 권리와 자산을 빼앗는 행위를 갖가지 논리로 정당화됐다. 반면 피지배계층은 “너희는 원래 힘이 없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불합리함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거듭해서 세뇌를 당해야 했다. 근대 들어서는 억압의 방식에 한층 교모해졌다. 자연법 개념이 서구 사회에 도입되면서 인간은 정신적/행동적 조작(manipulation)을 통해서만 남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치학자인 크로지에(Crozier)는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법이 이성과 자연권을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적 제도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여전히 부르주아와 국가 체제를 대변하는 논리로 가득 차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보니 무산계급, 즉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세기말 20세기초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엄청난 반작용을 감당해야 했고 연이어 1차 대전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세계 사회를 지배하던 ‘비합리적이지만 합리적인 것처럼 포장된’ 규범들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까라면 까’라는 식의 하드 파워(hard power)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바야흐로 21세기는 ‘소프트 파워’의 시대다. 제아무리 높은 사람이고 시장 지배적인 지위를 지닌 기업의 오너라 하더라도 타당한 논리와 제도에 입각한 처신과 말이 아니라면 사회적 뭇매를 피할 수 없는 것이 서구에선 상식이 된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문화는 여전히 근대와 전근대 사이를 표류하고 있다. 직장 내에서 일을 잘 못하거나 눈치가 없으면 “야이~”라는 감정적 수사와 함께 모멸을 당해야 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금전적 보상이 주어진들 조직 속에서 개개인이 박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일 속에서 보람과 가치를 느끼고 스스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어야 개개인이 조직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우리의 삶에서 힘의 작동은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개개인의 삶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권력을 건강하게 행사할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가. 힘을 쓰는 이와 힘의 영향을 받는 이들 사이에 배려와 소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