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ㆍ인도네시아 등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경제지원에 나서는 반면 베트남ㆍ필리핀 등 영토분쟁을 겪는 국가에는 차관회수 등 공세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이 아세안과 공동으로 영토분쟁을 해결하려 하자 아세안 역내국가들을 각개격파해 미국의 중국 포위전략을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가 폐막 다음날인 21일 태국으로 넘어가 인프라 투자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남중국해를 둘러싼 문제가 복잡해질수록 중국은 태국과 협동하고 관계를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도 "중국이 태국의 재고 쌀을 사준 덕분에 지역경제가 살아났다"고 화답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는 아세안이 똘똘 뭉쳐 영유권 분쟁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려는 것을 막으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EAS 기간에도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에 전폭적인 경제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은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국가에는 강경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22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최근 남중국해의 80% 이상을 자국영토로 표시한 지도가 인쇄된 새 여권을 발급하고 있다. 이 여권은 약 5개월 전부터 발급됐으며 베트남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난사군도ㆍ시사군도와 필리핀과의 분쟁지역인 황옌다오 등을 모두 중국령으로 표시하고 있다.
베이징에서 근무하는 한 외국 외교관은 "중국은 수백만장의 새 여권을 발급하고 있다"며 "새 여권을 들고 베트남ㆍ필리핀 등에 입국하는 사람이 늘어날 경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베이징 주재 베트남대사관은 중국 측에 공식 항의했다. 중국은 9월에도 필리핀에 5억달러의 차관을 회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현재로서는 중국의 이런 전략이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EAS 회의에서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를 공론화하려 했던 움직임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 WSJ는 아세안 국가들이 필리핀ㆍ베트남ㆍ인도네시아 등 미국과 함께 남중국해 문제를 국제공론화하려는 파와 태국ㆍ캄보디아ㆍ라오스ㆍ미얀마 등 이에 반대하는 친중국파로 양분됐다고 진단했다.
아세안이 G2 패권경쟁에 끼면서 장기적인 통합이나 성장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동남아시아연구센터의 이언 스토레이는 "아세안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없을 것"이라며 "역내국가 간 비난전이 전개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