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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현대미술은 어디서 왔을까? 그 뿌리를 찾아보는 전시 '춘추(春秋)'가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1일부터 10월31일까지 두 달 동안 열린다.
우선 전시장에 놓인 조각가 정현의 작품을 보자. 버려진 침목과 철근, 석탄이나 아스팔트 같은 평범한 재료에서 숨어있는 본성을 끄집어내 만든 '이름없는' 작품이다. 등을 웅크리고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 연상되는 작품에서 기다림 속에 축적된 에너지와 힘이 느껴진다.
나란히 걸린 몽인 정학교의 '죽석도(竹石圖)'를 보면 괴석 그림으로는 당대 최고로 꼽혔던 몽인의 작품이 정현의 조각과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다. 형태적 유사함은 물론 단순하지만 예리한 필치로 특징만 잡아내되 생생한 기(氣)를 놓치지 않은 기법도 닮았다. 이 작품을 본 적도 없는 작가 정현이 흡사한 조각을 만들어 낸 것은 핏속을 흐르는 한국 미술의 정체성이 발현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자의 논어에서 제목을 빌려와 현대작가(春)와 고미술(秋)을 연결해 보는 이번 전시는 우찬규 학고재 대표가 수년 전부터 기획한 것으로 "한국 고전미술의 현재성과 그 의미가 투영된 현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현대작가 11명의 작품과 고미술 12점이 짝을 이룬다.
고미술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불화 '암굴수월관음도'. 일본 공산사(功山寺)에 있는 14세기 후반 고려불화의 계보에 속한다고 소개된 작품이다. 이 관음보살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이용백의 설치작품 '알비노 고래'와 유화 '플라스틱 피쉬'가 걸려 있다. 진짜보다 더 화려한 가짜 미끼들이 진귀한 알비노 고래까지 낚아버리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난세를 냉소로 그려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음의 자비로운 시선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현대미술로 표현하는 작가의 시선은 크게 다르지 않다.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의 묵란은 김홍주의 작품들과 조화를 이룬다. 세필로 화면을 빼곡하게 채워가는 김홍주의 작업과 간략하지만 숙련된 필치로 우주적 깊이감을 드러내는 이하응의 난초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물이 콸콸 내리치는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는 젊은 작가 이세현의 '비트윈 레드(Between Red)'로 이어졌다. 실제 풍경에 충실하되 사의(寫意:마음을 묘사함)를 중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무장지대에서 복무하며 적외선 야간 투시경을 접했던 작가의 경험이 다시점의 붉은 산수화로 실현됐다.
조선시대 작자미상의 '방목도'와 윤석남의 '견공지몽'은 동물까지도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끌어안은 인간의 순수성을 보여준다. 황산 김유근의 '소림단학도'와 수조에 풀어놓은 물감이 느릿하게 퍼져가는 모습을 포착한 한계륜의 영상작품은 무위자연의 미학이 공통분모다. (02)720-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