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2월22일, 프랑스 육군 군법회의는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에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죄목은 반역죄. 독일로 넘겨질 비밀서류의 필적이 비슷하다는 혐의는 유대계 포병대위를 간첩으로 둔갑시켰다. 재판의 내용도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감춰졌다.
범인은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군부는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에게 무죄 선고를 내렸다. 여론은 둘로 갈라졌다. ‘군의 명예와 국가질서’를 내세운 반드레퓌스파와 진실과 정의ㆍ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 지지파간 팽팽한 논쟁 속에 소설가 에밀 졸라가 등장한다. ‘나는 고발한다’는 그의 신문 기고문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양분됐던 여론도 ‘무죄’로 돌았다. 결국 1906년 최고재판소에서 무죄를 확정 선고받은 드레퓌스는 소령으로 군에 복귀했다.
사건의 파장은 넓게 퍼졌다. 공작을 통해 진실을 은폐 왜곡,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정권에 맞선 지식인들의 저항과 승리는 현대 유럽 시민사회의 정신적 근간으로 자리잡았다. 심심하면 고개를 들던 왕정복고론이 자취를 감추고 군부와 가톨릭 등 기득권 세력도 힘을 잃었다. 자유와 평등ㆍ박애로 시작한 프랑스 대혁명이 이 사건을 통해 비로소 완성됐다는 평가도 있다.
드레퓌스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이스라엘. 재판 취재 과정에서 반유대주의를 통감한 오스트리아 신문의 유대인 기자 테어도어 헤르츨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운동을 주창,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드레퓌스 재판 종결 100주년을 목전에 둔 요즘 프랑스는 인종차별로 인한 소동을 겪고 있다. 중동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고 분노와 원한만 쌓여간다. 드레퓌스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