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코아로직, 엠텍비젼 등 국내 주요 휴대폰 부품주들의 주가가 줄줄이 폭락하며 연초보다 20%나 떨어졌다. 이른바 ‘소니에릭슨’ 쇼크 때문이었다. 소니에릭슨이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휴대폰시장을 잠식하면 이들 부품 회사들의 실적도 악화될 것으로 전망됐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4ㆍ4분기에 삼성전자는 휴대폰 시장에서 매출 기준으로 4위였던 소니에릭슨에 추월당했고, 5위인 LG전자의 휴대폰 부문 영업이익률은 2.7%에 그쳤다. ‘IT 한국’의 간판인 휴대폰 산업에 경고음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ㆍ중국 시장에서 일본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 세계 1위 조선산업도 중국업체들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한국의 주요 산업들에서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외환위기 이후 피나는 구조조정을 통해 수익성, 건전성 등의 각종 경영지표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뒀지만 글로벌 경쟁력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이 생기고 있다. 김성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전자ㆍ자동차ㆍ조선 등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면서도 “최근 몇 년간 기업들의 실적 호조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얻어진 마지막 과일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기업들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아니라 외환위기 이전의 설비투자로 생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수익성 개선도 저금리와 환율 상승 덕분이라는 지적도 있다. 특히 경쟁국인 일본이 최근 10년 불황의 터널에서 빠져 나오고, 중국이 세계시장에서 공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외환위기를 불러왔던 ‘넛 크래커(nut-cracker)’ 속 호두 신세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업 성적표‘외화내빈’= 현재 우리 기업은 겉으로는 선진 기업 부럽지 않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002~2005년 한국 제조업의 부채비율은 평균 116%로 미국(150%), 일본(145.9%)보다 낮다. 같은 기간 매출액영업이익률도 평균 6.8%로 미국(6.0%)과 일본(3.9%)을 능가했다. 성장성 지표인 매출액증가율은 한국이 평균 9.3%로 미국(6.3), 일본(2.3%)을 크게 웃돌았다. 게다가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됐던 경영 구조의 불투명성과 차입에 의한 사업확장 풍토도 거의 사라졌다. 부실 부문의 상시정리 체제를 갖추었고 경영 투명성 강화, 주주 중시 경영 등도 어느 정도 정착됐다. 그러나 내막은 다르다. 우선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수익성 개선된 것은 상당부문 외부 요인 탓이다. 뒤집어 말하면 저금리 시대가 끝나고 환율이 추가 하락하면 기업들이 또다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제조업 수익성은 2002년 이후 크게 개선됐지만 개선 폭의 절반 정도는 금리 및 환율 등 거시 경제적 요인이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기업들의 실적 호조가 일부 대형기업의 고수익에 따른 통계적 착시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 지난 3ㆍ4분기 상장 제조업체 가운데 적자 업체는 33.9%에 달했고 영업이익으로 금융 비중도 감당하지 못하는 업체도 38.8%에 이르렀다. 특히 기업간 양극화가 문제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제조업체의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매출액영업이익률 격차는 지난 외환위기 이전(91~97년) 3.5%포인트에서 외환위기 직후(98~2001년) 1.9%포인트로 줄었으나 2002~05년에는 3.5%포인트로 다시 확대됐다. 또 전기ㆍ전자, 화학 등 상위 3대 주력업종에 대한 경제력 집중도가 더 높아져 업종간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다. ◇한계점에 이른 성장성= 현재 한국기업의 가장 큰 문제는 ‘기업가 정신’이 후퇴, 지나친 보수 경영으로 설비 및 연구개발(R&D) 투자가 줄면서 성장잠재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설비투자는 지난 1990∼97년 연평균 7.8% 늘었지만 2000∼05년에는 연평균 1.15% 증가하는 데 그쳤다. 김대수 한은 금융경제연구원 경제제도연구실장은 “그동안 설비투자의 부진에도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은 저금리로 자본비용이 줄었기 때문”이라며 “외환위기 이후 누적된 설비투자 부진이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기존 설비에 의존하던 기업들의 성장전략이 한계에 다다랐고, 이로 인해 경제전체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성장성 후퇴는 세계 1등 상품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세계 1등 상품 수는 지난 98년 87개에서 2004년 59개로 오히려 28개(32.2%)나 줄었다. 같은 기간 일본은 328개에서 291개로 줄었으나 2004년 한국보다는 232개나 많다. 중국ㆍ인도 등 신흥국들과 경쟁에 고전하면서도 일본과 격차는 줄이지 못하고 있는 것. 반면 제조업을 뒷받침할 서비스업의 경우 성장성이 외환위기 전보다 오히려 크게 떨어졌다. 한은에 따르면 서비스업전체의 성장성을 나타내는 매출액증가율(연평균)은 외환위기 전(90~97년) 18.3%에서 외환위기 후(2002~2005년) 3.5%로 크게 떨어졌다. 전체 산업에서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선진국의 지난 80년대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성장성이 떨어지면서 2005년 기준 우리나라 서비스업 부가가치(명목) 비중은 56.3%로 일본(69.4%)이나 독일(69.8%), 미국(76.7%)보다 훨씬 낮았다. ◇수출기업 설자리 줄어든다 = 지난해말 현대경제연구원은 ‘차이나 리스크 현실화된다’, ‘한국경제,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나’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보고서를 연달아 내놓았다. 중국이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면 동북아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국내 수출 기업의 입지가 약화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뒤로 하고 경제회복의 속도를 높이는 반면 한국경제는 외환 위기 이후 새로운 경제 활력을 얻는데 실패했다”며 “앞으로 한국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고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외환위기의 원인중 하나로 ‘비용의 중국’과 ‘효율의 일본’의 협공에 따른 수출기업들의 경쟁력하락을 꼽는다.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 만만찮게 흘러가고 있다. 불황기에 구조개혁을 통해 힘을 축적한 일본 기업들은 해외 인수합병(M&A), 미래사업 발굴 등 공격 경영을 가속화하고 있고, 중국은 한국과 기술 격차를 급속도로 좁히고 있다. 문지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글로벌 기업의 공격적 행보와 개도국 기업의 세계시장 진출 속에 한국기업의 입지가 날로 취약해지고 있는 위기 국면”이라며 “보수경영 기조에서 탈피해 과감한 투자, 글로벌 경영 등을 통한 성장 전략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