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침묵속 "민주화·인권 개선" 기습시위 잇달아<br>중국 정부 소요사태 우려 감시 강화·여론 통제등 초긴장<br>'톈안먼 사건' 인터넷서 아예 검색 안돼… 광장 철통경계도<br>점진적 개혁 추진 불구 "새장에 갇힌 민주화" 한계 지적
| 홍콩에서는 31일(현지시간) 중국의 톈안먼 민주화운동 20주년을 기념하는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에서 시민단체 회원과 학생 등 8,000여명은‘6.4 톈안먼 민주화운동을 복권하라(平反六四)’고 쓰인 피켓을 들고 중국의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빅토리아공원에서 홍콩정부 청사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 홍콩=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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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들이 톈안먼 광장에 진입하자, 한 시민이 그 앞을 가로 막아 섰다. 사진=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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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4사건(톈안먼사태)에 대해 다들 생각은 하고 있지만,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습니다."
1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만난 중국 공산당원 천밍(陳明ㆍ가명) 씨는 "한 신문에서 1단짜리 6ㆍ4사건 관련 기사를 넣었다가 해당 기자는 물론 신문사 간부들이 모두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1989년 6월4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중국 대학생과 시민들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유혈 진압된지 꼭 20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 곳 베이징에서는 톈안먼사태를 기념하는 어떤 행사도 볼 수 없고, 톈안먼 사태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20년 전 수 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비극의 현장인 톈안먼을 철통같이 지키는 공안(경찰)들이 톈안먼 사태에 대한 '금기(禁忌)'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13억의 중국인들은 여전히 강요된 침묵 속에 톈안먼사태 20주년을 맞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민주화의 가치와 인권개선에 대한 기대까지 잠재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중국 정부 초긴장= 톈안먼 사태는 지난 1989년 6월 4일 학생과 시민 100만여명이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탱크를 앞세운 당국의 무력진압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특히 올해는 예년의 기념일과 달리 20주년이란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중국 당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다. 홍콩 언론 등에 따르면 중국 공안당국이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앞두고 일부 반체제 인사들을 일시적으로 수도인 베이징 밖에 머물도록 조치하는 등 감시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의 인터넷은 톈안먼사태에 대한 '금기'의 공간이다. 중국의 최대 검색 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에서 '톈안먼 사건'을 검색해 보면 "법률과 정책에 맞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에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뜬다. 중국의 사이버공간에서 톈안먼사태에 대한 거론자체가 원천 봉쇄돼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이달 1일부터 오는 9월 30일까지 무허가 인터넷 카페를 단속하는 동시에 부모의 도시 이주로 지방에 남아있는 청소년 자녀들이 음란물이나 폭력 사이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로 했다. 이 같은 규제는 톈안먼사태 20주년 기념일과 오는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60주년 기념일을 앞둔 여론통제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중국 언론들에게도 '재갈'이 물려지고 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중국 광둥성 당국은 지난 22일 미디어 매체 회의를 긴급 소집,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중국 정부는 톈안먼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을 적극 방어하고 있다. 마자오쉬(馬朝旭)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최근 정례브리핑에서 "1980년대 말 중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풍파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 당과 정부는 이미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면서, 톈안먼 사태를 앞두고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외신의 지적에 대해 "정보의 정확성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 각종 시위 잇따라= 그러나 중국 정부의 이 같은 '강요된 침묵'에도 불구하고 중국 각지에서는 각종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베이징에서는 최근 톈안먼사태 2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인권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이어 터졌다. 지난달 27일 베이징 시내 국무원 신문판공실 건물 앞에서는 중국 각지에서 상경한 민원인들이 중국을 방문중인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에게 "중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촉구하는 기습시위를 벌였다.
이에 앞서 25일에는 민원인 1,000여명이 베이징 고등법원 민원실 앞에서 인권 보호를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기습시위에 나섰다.
중국인들의 공권력의 전횡에 대한 거센 항의도 톈안먼사태 20주년을 앞둔 중국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달 23일 중국 광둥(廣東)성 잉더(英德)현에서는 차 재배 농민 300여명이 동료 농민들을 구속한데 대한 불만으로 경찰서를 습격, 건물을 파괴하고 경찰 차량들을 불태우는 폭력사태가 빚어졌다.
또한 같은 달 18일에는 간쑤(甘肅)성 후이닝(會寧)현에서 농민 1,000여명이 한 오토바이 운전자가 경찰에 연행된데 항의하며 경찰서를 공격했다.
해외에서도 톈안먼사태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 등이 잇따르고 있다. 1989년 톈안먼 학생 민주화운동 당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 만든 '톈안먼 어머니회'는 최근 미국 뉴욕의 인권단체를 통해 발표한 성명을 통해 "우리는 톈안먼의 비극과 관련한 정보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홍콩의 한 시민단체는 지난 31일 홍콩에서 시민 8,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톈안먼사태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추모행사가 개최했으며, 오는 4일 밤에는 대규모 촛불집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중국 정부는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개선에 대한 안팎의 요구에 대응해 점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국무원은 최근 발표한 '2009-2010년 국가인권 행동계획'을 통해 "생계와 발전을 위한 인민들의 권리를 최우선에 두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동등한 참여 및 발전권을 법적으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개혁은 '새장 속에 갇힌 민주화'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 중국문제 전문가는 "중국 지도부도 경제발전에 부합하는 정치 개혁을 위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중국이 생각하는 정치 개혁은 서구인들이 요구하는 민주화나 인권 개선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시위격화 리펑 책임… 727명 희생"
■ 속속 드러나는 진상
20여년간 철저하게 역사의 베일 속에 감춰졌던 6ㆍ4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진상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최근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자오쯔양(趙紫陽)은 '국가의 죄수'(The Prisoner of the State)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통해 "1989년 학생들의 톈안먼 민주화 시위가 격화된 책임은 당시 리펑(李鵬) 총리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자오쯔양은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주장한 덩샤오핑에 반기를 들었다가 권좌에서 쫓겨난 뒤 가택연금 생활을 하다 2005년 1월 사망한 비운의 정치가다.
회고록에서 자오쯔양은 "1989년 4월 26일 중국 공산당의 대변지 격인 인민일보가 사설을 통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학생들의 시위를 '반(反) 공산당, 반(反) 사회주의적'이라고 매도함으로써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고 규모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은 당시 학생시위에 대한 자신의 발언(비판발언)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덩샤오핑의 발언은 다음날 인민일보에 각색돼 실렸다"면서 인민일보 사설의 배후에는 리펑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력진압 결정시 정치국 상무위 표결절차가 없었다"고 폭로했다.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관영 신화통신의 국내 뉴스부 주임이었던 장완수(張萬舒)는 최근 출간한 저서 '역사의 대폭발'(歷史的 大暴炸)에서 "톈안문 사태의 희생자 727명이었다"고 주장했다.
장 전 주임은 중국 홍십자사 고위간부의 말을 인용해 톈안먼 사태 희생자가 민간인 713명과 군인 14명 등 727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는 500페이지 분량의 이 책에서 중국 정부가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한 군 병력이 1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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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주역들 교수·방송인등 활동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발생하고 20년이 흐른 지금 그 때의 주역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시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군부를 움직여 톈안먼 사태를 무력 진압했던 양상쿤(楊尙昆) 전 국가주석, 자오쯔양(趙紫陽) 전 공산당 총서기 등은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또 다른 주역인 리펑(李鵬) 전 총리는 올해 81세로 건강 악화설이 나오는 가운데 10권의 책을 쓰기 위해 준비중이다.
톈안먼 시위를 주도한 막후 실력자 왕단(王丹)은 10년간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지난 1998년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대학에서 사학과박사과정을 밟았으며, 오는 9월 대만 국립정치대의 조교수로 임명될 예정이다.
당시 베이징지역 대학생연합회장이었던 신장(新疆) 위구르 출신인 우얼카이시(吾爾開希)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유학한 뒤 '해외중국민주전선'을 결성해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 지금은 대만에서 TV 사회자로 활동하고 있다.
톈안먼사태의 대표적인 여학생 지도자 차이링(柴玲)은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지금은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왕쥔타오(王軍濤)는 1991년 정부전복 음모 혐의로 체포된 뒤 13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생활을 하다 1994년 미국에 정착했다.
민주화 시위 당시 맨 몸으로 탱크를 막아서 민주화항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왕웨이린(王維林)은 중국의 체포망을 피해 대만으로 피신했으며, 지금은 대만 타이베이 고궁(故宮)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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