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내복을 입는 아이들

박정래 <제일기획 미디어전략硏 소장>

지난 7월부터 필자는 에너지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에너지 절약 홍보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대부분 에너지원이 수입된다고 한다. 근래 들어 국제정세로 유가가 턱없이 오르고 불안정한데다 앞으로 형세도 만만찮아 에너지 절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자문활동을 하기 전에는 전기ㆍ가스ㆍ석유 등과 관련된 생활연료나 냉난방, 주변 곳곳에서 직면할 수 있는 에너지의 중요성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경제 규모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3위이고 인구는 25위 수준인데 총 에너지 소비량은 세계 10위, 석유 수입량 세계 3위, 소비는 6위라고 하니 이런 상태로는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그렇게 굴곡이 깊은 것처럼 보이던 외환위기의 고통도 잊혀진 것 같고, 올 한해 내수침체와 경기불황을 겪었으나 에너지에 관련된 문제는 거의 예외인 듯 주변에 낭비요인이 넘쳐나고 있다. 출ㆍ퇴근시 나 홀로 차량이 여전히 많으며 겨울이라 주말에는 스키 행락객 인파로 도로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버스ㆍ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 사무실ㆍ아파트와 같은 주거 및 생활공간에서는 겨울형 의복이 불편하기만 하다. 올해 두번째 자문회의에 참석했다가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님으로부터 한해를 마감하는 에너지 절약 캠페인의 슬로건이 '따듯한 가족 페스티벌'이고 그 실행계획으로 '내복 입기 캠페인'을 벌인다고 해서 매우 뜻밖이었다. 겨울철 이상기온 탓도 있었지만 근래 몇년 동안 내복을 입지 않아도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쾌적한 실내온도가 섭씨 18~21도 정도라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잘 실천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상으로 유지되고 있는 실내온도를 3도 정도 낮춰 에너지를 절약하고 대신 내복을 입어 건강체온을 유지하자는 취지였다. 건물과 가정의 난방온도를 3도만 낮추면 연간 8,400억원을 절약된다고 한다. 실감이 나지 않지만 요즘 같은 고유가시대, 경제난의 시기에 그렇게라도 될 수 있다면 하고 공감을 하면서도 내복을 입었을 때의 불편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공단의 한 관계자가 전해준 다음 이야기로 다시 가다듬게 됐다. 최근 서울 어느 초등학교에 에너지 절약 강사로 초대를 받고 강의를 하게 됐는데 그 초등학교 학생들을 조사해보니 60%가 내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지역은 산동네와 서울 변두리 지역이어서 생활수준이 낮은 탓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지만 필자에게는 뭉클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머니께서 광목으로 만든 내복 스타일 속옷이 사타구니를 스쳐 부풀어 오르고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바람이 몰아쳐도 산으로 들로 또래들과 쏘다니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폈던, 어제 같은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합성내복이 너무너무 좋아 솔기가 부풀도록 입고도 기워 입던, 추운 줄 모르고 돌아다니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어찌 보면 이제는 상대적 빈곤함과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빈곤에 내몰린 또 다른 아이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다시 잡초처럼 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 한해 모두 어렵다고들 하고 더 어려울 것이라는 2005년 경기전망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가난했던 시절처럼 벌거벗고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심정이라면 무엇인들 못할까 하는 자신감이 들기도 한다.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너무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과거보다 더 격심한 빈부차가 있으며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권익과 부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유야 어찌됐든 경제적으로 혹독하게 추운 이 시절, 생존을 위해 '내복을 입는' 심정으로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자신부터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어떤 것들을 사랑해야 하고,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할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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