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3월 12일] <1642> 명예혁명, 영란은행


'명예혁명은 명예롭지 않다. 종교적 관용을 베풀려는 국왕 제임스2세에 대한 의회 권력의 반동일 뿐이다.' 프랑스계 미국인 사학자 자크 바전의 진단이 이어진다. '무혈혁명도 아니다. 아일랜드를 피로 물들였으니까.' 영국이 자랑하는 명예혁명(1688년)이 과연 명예로웠는지는 판단의 영역이지만 후자는 역사적 사실이다. 오라네공 빌렘(윌리엄3세)과 장인 제임스2세의 권력투쟁에서 숱한 아일랜드 가톨릭교도가 목숨을 잃었다. '두 왕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장인과 사위의 싸움이 시작된 것은 1689년 3월12일. 프랑스로 망명했던 제임스2세가 프랑스 지원군 6,000명과 함께 아일랜드 남부에 상륙하면서부터다. 위기를 느낀 윌리엄3세는 네덜란드ㆍ독일에서 데려온 용병과 영국인 신교도 군대를 동원해 아일랜드에서 8개월 동안 세 차례나 큰 전투를 치렀다. 결과는 윌리엄3세의 대승. 최소한 1만명 이상의 가톨릭군이 희생된 전쟁을 통해 아일랜드는 신교도 세상으로 바뀌었다. 가톨릭 귀족들의 토지도 전체의 7분의1로 줄어들었다. 왕당파와 아일랜드의 저항은 윌리엄3세와 메리 여왕이 네덜란드에서 건너올 때 준비한 자금(200만길더)를 고갈시켰다. 아일랜드의 굴복시킨 뒤 프랑스와도 전쟁을 치렀던 윌리엄3세가 필요한 연간 전쟁비용은 550만~850만파운드. 증세와 복권발행으로도 돈이 모자랐던 윌리엄3세는 네덜란드의 선진금융 기법을 들여와 1694년 잉글랜드은행을 세웠다. 잉글랜드은행은 정부에 연리 8%로 120만파운드를 빌려주는 대신 공채발행을 도맡는 등 정부의 은행으로서 독점적 권리를 누렸다. 근대적 의미의 첫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의 출범과 성장에는 명예혁명이라는 포장 속에 가려진 장인과 사위 간 유혈 권력투쟁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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