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외환위기 그후 10년] (2부-3) 현대와 대우, 엇갈린 운명

■ 외환위기 그후 10년 '한국경제 좌표는' <제2부> 구조조정의 빛과 그림자<br>현대 '갱생' 대우 '분해' …시장신뢰가 갈랐다<br>대우 '대마불사'만 믿고 차입경영 몰두…시장 등돌려<br>현대, 2000년 '왕자의 난' 계기 車·중공업등 계열분리

98년 11월19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가 김우중 회장 주재로 열렸다. 이날 전체 회의에서는 수출활성화를 위해 각 사별로 수출비상체제를 구축하고 인턴사원 채용확대 문제 등을 논의했다. 그러나 재계의 관심은 온통 반도체 등에 대한 '빅딜' 로 모아졌고 이날 회장단 회의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김승연 한화그룹회장(사진 왼쪽부터),김 회장,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회장, 정몽구 현대회장.



[외환위기 그후 10년] (2부-3) 현대와 대우, 엇갈린 운명 ■ 외환위기 그후 10년 '한국경제 좌표는' 구조조정의 빛과 그림자현대 '갱생' 대우 '분해' …시장신뢰가 갈랐다대우 '대마불사'만 믿고 차입경영 몰두…시장 등돌려현대, 2000년 '왕자의 난' 계기 車·중공업등 계열분리 김민열 기자 mykim@sed.co.kr 98년 11월19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가 김우중 회장 주재로 열렸다. 이날 전체 회의에서는 수출활성화를 위해 각 사별로 수출비상체제를 구축하고 인턴사원 채용확대 문제 등을 논의했다. 그러나 재계의 관심은 온통 반도체 등에 대한 '빅딜' 로 모아졌고 이날 회장단 회의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김승연 한화그룹회장(사진 왼쪽부터),김 회장,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회장, 정몽구 현대회장. 관련기사 • '외환위기 그후 10년' 시리즈 전체보기 • 이연수 당시 외환은행장 직무대행 • 100兆 넘는 부실채권 처리 외환위기의 소용돌이속에서 국내 대표적인 기업들마저 생존의 기로에 섰던 1998년 6월. 글로벌 투자은행인 크레디 스위스퍼스트보스턴(CSFB)은 ‘한국 10대재벌 개혁’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97년말 기준으로 단기적인 현금 흐름 등 전반적인 건전성을 평가해 현대그룹과 대우그룹에 대해 나란히 ‘1.7’의 점수를 매겼다. 시장은 메가톤급 충격을 받았다. 두 그룹이 받은 점수는 삼성그룹 4.3, LG그룹 3.0, SK그룹 4.3에 비해 크게 낮고, 자력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형선고였기때문이다. 하지만 8~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현대그룹은 하이닉스반도체, 현대건설 등 일부 기업만 채권단 손에 들어갔을 뿐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 등 3개 그룹으로 분화돼 승승장구하고 있다. 반면 대우그룹의 경우 김우중 회장이 오랜 해외 도피 생활을 하다 중형을 선고받았고, 계열사는 산산조각 나 새주인을 찾았거나 찾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두 그룹의 운명이 천지차이로 엇갈린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떠오르는 건 시운(時運)이다. 대우는 국내외 감시의 눈이 서슬 퍼런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초반 위기를 맞았다. 반면 현대는 구조조정의 칼날이 한결 무뎌진 2000년 후반 위기를 맞은 탓에 막대한 수혈을 받으며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룹 전체의 짐이 됐던 대북 사업이 DJ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낸 아이러니도 작용했다.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시장의 신뢰’였다. 김 회장은 대우 그룹에 암이 온 몸으로 퍼져나간 뒤에도 ‘고금리 차입’이라는 약물로 버티며 계열사를 오히려 더 늘리는 바람에 정부와 채권단, 나아가 국내외 투자자들과의 신뢰를 잃었다. 반면 현대는 ‘왕자의 난’이라는 형제간 싸움으로 원치 않았던 구조조정을 단행, 그룹 전체로 부실이 전이되기 전에 메스가 가해졌다. ◇‘대마불사’를 믿은 대우= 98년9월28일 청와대 경제특별 회견. 김대중 대통령은 “대기업은 오늘의 경제위기에 책임이 크기 때문에 개혁해야 한다는 데 추호의 변함도, 일보의 양보도 없다”고 못박았다. 대기업도 재무구조 개선 등의 구조조정을 외면하면 퇴출시키겠다는 뜻을 또 한번 강조한 것이었다. 이미 정부는 그해 2월부터 분기 또는 월별로 정ㆍ재계 간담회를 개최하며 5대 그룹의 구조조정을 독려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삼성, LG, SK, 현대 그룹 등은 외자유치, 자산매각, 계열사 정리 등을 통해 나름대로 성의표시를 하는 데 안간힘을 기울였다. 4대 그룹 가운데 구조조정이 가장 더디다는 비판을 받았던 현대 그룹마저 부채비율이 97년말 572%에서 99년말 181%로, 계열사는 같은 기간 62개에서 35개로 줄었다. 반면 대우만은 ‘대마불사’의 신화를 믿었다. 김 회장은 해외 채권자로부터의 상환 압력이 거세지고 국내에서도 돈을 빌리기 어려울수록 쌍용자동차 인수 등 ‘몸집 불리기’에 더욱 매달렸다. 95년 138개이던 국내외 계열사는 99년 289개로 불어났다. 주채권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의 최종욱 전 기업분석부장은 “엄청난 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근본적인 구조조정은 추진하지 않고 회사채, 기업어음(CP) 등의 금융차입을 통한 기업 확장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97년말 28조7,120억원이던 대우그룹의 총차입금 규모는 8개월만에 17조5,310억원이나 불어나 98년 8월말 46조2,430억원을 기록했다. ◇시장의 신뢰를 잃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대우그룹은 99년7월 채권 금융기관에 ‘SOS’를 쳤지만 신규 지원액은 4조원에 불과했다. 사실상 파산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그해 8월26일자로 대우의 워크아웃이 집행됐다. 물론 “현대를 살리기 위한 파격적 지원의 일부만 대우에 지원했다면 부도 처리되지 않았을 것”(이한구 당시 대우경제연구소장(현 한나라당 의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우 사태를 지켜봤던 채권단 관계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국내는 물론 유럽, 중남미, 구소련 연방 국가 등에 깔아놓은 부채 규모가 90조원인지, 100조원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며 “40조원을 투입해도 살릴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김 회장이 대우자동차 등에 대한 경영권을 끝까지 고집한 데다 GM으로부터 외자 유치 약속도 공수표로 끝난 게 결정타를 날렸다. 결국 DJ와 관료들의 믿음마저 사라지면서 대우는 공중분해의 외길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전화위복이 된 ‘왕자의 난= 대우와 달리 현대그룹에게 ‘시운’은 절묘했다. 정몽구(MK)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몽헌(MH) 현대그룹 회장간의 경영권 싸움(2000년1월) 이후 현대상선(3월), 현대건설(5월) 등 현대 주력 계열사들은 차례로 유동성 위기에 내몰렸다. 다급해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3부자 동시 퇴진’을 전격 선언했다. 경영권 분쟁이 일단락 되는 듯 했으나 MK측이 반기를 들면서 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조차 신인도가 하락하자 채권단과 오너 일가는 서둘러 현대 그룹에서 중공업, 자동차 등을 계열 분리했다. 이 와중에 가장 큰 골치덩어리였던 현대건설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가 MH계열의 현대 그룹에서 분리돼, 채권단 관리하로 들어가는 행운 아닌 행운도 뒤따랐다. 현대로서는 억울하겠지만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뺏기지 않으면서 다른 계열사는 생존의 길이 열린 셈이었다. 이연수 당시 외환은행 부행장은 “코메르츠(외환은행 대주주)에서 대우에 대한 기존 여신은 모두 줄여나갔지만 현대는 펀더멘탈을 좋게 평가했다”며 “대우의 경우 그룹 전체의 부실이 엮어 있었지만 현대는 이미 분리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 덕인지 하이닉스에 7조2,000억원, 현대건설에 2조9,000억원이라는 전폭적인 수혈이 감행됐다. ◇대북 지원의 후광도 한몫= 금융 시장 불안을 야기했던 대우 사태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이었을까. 대우와 달리 채권단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졌다. 더구나 대우 때와 달리 기업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칼날이 상당히 무뎌진 상태였다. IMF 조기졸업 선언을 앞두고 가시적인 성과에 대한 집착도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DJ의 부채 의식이 현대 그룹의 회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2000년 당시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에 대해 대북 송금 문제 때문에 정부가 살리려는 의지가 강력한 것으로 보였다”고 토로했다. 채권단의 대규모 지원 이후 때마침 건설과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는 요행도 뒤따랐다. 하이닉스와 현대건설이 부실기업에서 국내 기간산업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국내 기업의 해외 매각에 대한 신중론이 본격화된 것도 이때부터다. 입력시간 : 2007/01/2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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