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3월 29일] <1656> 판데 사건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 3월 29일] 판데 사건 권홍우 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아프가니스탄군 600명에 러시아군 40명. 1885년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격돌한 양군의 전사자 수다. 전투가 발생한 장소는 판데(Panjdeh) 마을. 그리 알려지지 않은 작은 오아시스인 판데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는 온갖 방법을 다 써먹었다. 러시아군의 남진을 우려하는 영국에 '영토 욕심이 없다'는 의지를 전하는 한편으로 병력을 보냈다. 인도 방위에 사활을 걸던 영국은 병력을 직접 증파하는 대신 아프가니스탄의 유럽식 군대를 보내 맞섰으나 아프간 군대는 러시아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러시아군의 코마로프 장군은 아프간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1885년 3월29일 밤, 먼저 발포하도록 유도했다. 선제공격을 당했다는 명분을 앞세운 러시아군은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런던 증시가 폭락하고 야당인 보수당은 자유당 내각의 나약한 대응을 질타하고 나섰다. 의회가 1,100만파운드의 전시예산을 편성한 뒤 영국 본토는 물론 식민지 곳곳에서도 전쟁 상황에 들어갔다. 가장 확실한 유탄을 맞은 곳이 조선. 영국 극동함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의 거문도를 무단 점령(4월15일)해버렸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함대와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영국은 러시아와 평화조약을 맺은 뒤에야 점령 23개월 만에 거문도에서 물러났다. 영국과 러시아가 판데의 중립지대화에 합의하며 사건은 종결됐으나 파장은 영국의 정권 향방에 영향을 미쳐 강경파인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다. 판데에서 멈췄던 러시아군의 남진은 94년이 지난 뒤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으로 이어졌다. 상황은 지금도 비슷하다. 아프간이 러시아 대신 미국을 상대로 저항하고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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