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지금의 증권시장에 해당하는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출범했다. 1945년 8월 해방 이틀 전까지 영업을 했던 이곳에서 가장 큰 부(富)를 이룩한 인물은 의외로 조선인. 주인공은 1903년 대한제국 고위관료를 지낸 조중정의 큰아들 조준호였다. 온갖 사기와 투기가 들끓었던 이곳에서 주식으로 300만원(현재가치 3,000억원) 이상의 부를 축적한 인물은 그가 유일했다. 근대적 개념의 주식시장에서 돈을 번 조선인은 조준호 외에도 많았다. 충청남도 당진에서 15년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착실히 모았던 새경으로 몇 일 만에 4,000원(4억원)을 벌었다는 전설의 당진총각, 경찰출신으로 신문의 경제면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주식에 투자해 5년 만에 50만원(500억원)을 거둬들인 유영섭 등 이른바 조선인 '슈퍼 개미' 에 관한 기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암울했던 시대로 기억되는 1930년대 한반도.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부(富)에 관한 관심은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경성기담'(2006)으로 인문학 부문에서 주목받았던 전봉관 KAIST 교수가 이번에는 '돈'을 주제로 한 책을 썼다. 책은 신문기사 등에 기록된 사실과 학술서 등에 등장하는 인물에 저자의 역사적인 상상력을 펼쳐보인다. 대부분의 역사책이 통시적인 접근을 통해 시대를 분석해 나가지만, 저자는 단편적인 개인의 일대기를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우회적으로 시대적인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책은 1925년 함경북도 나진에서 시작된 부동산 투기의 중앙에 있었던 김기덕 청진 동일상회 대표이사(두취:頭取), 부동산으로 번 돈 일체를 사회에 쾌척,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社會葬)을 치렀던 백선행, 가문의 신원(伸寃:조상의 원한)을 풀어내기 위해 평생 모은 돈을 내 놓은 여걸 최송설당 등 변화와 혼동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경제사를 미시적으로 접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