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외환위기 그후 10년] <1부-3> 너무 빨리 벗어던진 IMF

환란 부른 구조적문제 외면…시스템개편 용두사미<br>'IMF 조기졸업' 겉포장에 취해 질적도약 기회 놓쳐<br>신용대란·부동산 버블 등 위기상황 여전히 되풀이



[외환위기 그후 10년] 너무 빨리 벗어던진 IMF 환란 부른 구조적문제 외면…시스템개편 용두사미'IMF 조기졸업' 겉포장에 취해 질적도약 기회 놓쳐신용대란·부동산 버블 등 위기상황 여전히 되풀이 이철균기자 fusioncj@sed.co.kr 관련기사 • [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김용환 • 정치 공약에 멍드는 경제 • [데스크 칼럼] 외환위기의 잔영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환란(換亂) 주범의 3인방’이라는 말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었다. 사상 초유의 고통을 견디는 데 뭔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몇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린 결과 경제 시스템 자체를 고치는 작업은 갈수록 용두사미가 돼 버렸다” 강만수 전 재경원 차관의 해석을 빌려 보면 그의 말은 보다 분명하게 이해된다. 강 전 차관은 “97년 위기는 외환부족에 의한 유동성 위기라는 측면과 고비용ㆍ저효율에 의한 구조적 위기라는 측면을 함께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때를 단순히 ‘환란’이라는 단어로 이해하곤 했는데 여기에는 ‘언어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일시적으로 소비를 많이 해 호주머니에 구멍이 났으니 한 1년 열심히 일해 ‘지불 능력’을 키우면 된다는 식으로 97년 위기를 간단하게 넘겨버렸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단순 지불 위기론’이 그것이다. 97년 상황은 한국 경제의 총체적·시스템적 위기, 다시 말해 ‘경제위기’였다는 해석을 애써 외면한 탓에 불과 2년만인 99년 11월19일 김대중 대통령은 경남 창원에서 열린 바르게살기중앙협의회 전국대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선언을 내놓기에 이른다. 2000년 4월로 예정된 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5개월 여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외환위기가 ‘축복된 재앙’이건, ‘광복 이래 최대의 국난’이건 한국 경제가 구조조정을 통해 질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면 과장된 표현이 될까. ◇97년 이후 반복되는 경제 위기= DJ정부는 IMF 극복을 선언하는 행위를 여러 차례 극적인 장면을 통해 활용했다. 정치적 포장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두 가지 장면을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1 2001년8월23일 오전 10시30분.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 차입금 가운데 잔액 1억4,000만 달러를 ‘최종’ 상환하는 서류에 결재를 했다. 한국이 IMF관리 체제에서 조기 졸업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전 총재는 “구제금융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돌이켜보면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는 내용의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상환결재의 역사적 의미를 고려, 결재에 쓴 필기구와 서류를 화폐금융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2 그보다 하루 전인 8월22일. 김대중 대통령은 97년 ‘IMF 체제’를 촉발시킨 진원지인 기아자동차 광명 공장을 방문한 뒤 청와대에서 열린 IMF조기졸업 기념 만찬을 열었다. DJ는 “대통령에 당선됐을 당시 38억 달러였던 외환보유고는 현재 1,000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5대 외환보유국이 됐다”며 감회를 밝혔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활기는 없었다는 게 당시 현장에 있던 관료들의 증언이다. 2년 전 미리 ‘IMF 극복’을 선언했을 때 보다 오히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바로 경제가 ‘IMF 조기졸업’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꾸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7ㆍ8월의 산업생산증가율은 각각 전년 동월보다 각각 5.7%, 4.7%로 떨어졌다. 설비투자증가율은 무려 -10.4%, -19.0%를 기록했다. 수출증가율은 -20.5%, -20.1%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주식시장은 외국인의 이탈로 코스피지수가 500포인트 선을 겨우 유지한 상태였고 9ㆍ11테러직후에는 400선대로 떨어졌다.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은 “97년에 IMF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그 다음 시기는 2001년이었을 정도로 당시 경제는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정부는 부랴부랴 내수진작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재정ㆍ금융ㆍ세제 등 거시정책 수단과 규제완화ㆍ건설투자ㆍ설비투자ㆍ고용안정 등 미시정책 수단이 모두 망라됐다. 하지만 이 같은 단기 부양책은 2002년 카드 버블 사태로 이어져 수많은 신용 불량자를 양산, 아직도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최근에는 주택시장의 거품과 가계부채 급증이 새로운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이철용 LG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앞으로 우리 경제가 위기를 겪게 된다면 IMF 때처럼 특정 부문에서 일시적으로 위기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 전분야에 걸쳐 만성적ㆍ장기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외환위기의 본질을 외면했다= 현재 외환위기의 본질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외국자본의 음모론에서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파열음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주력 산업의 과잉중복 투자 및 전반적인 기업 수익성 하락 등 ‘한국형 발전모델’이 한계에 봉착했음은 물론 경제가 항상 정치에 휘둘리는 고질적인 병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한국경제의 이 같은 모습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부연구위원은 “한국식 자본주의 성장 모델의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급작스러운 자본시장 개방으로 외부 악재에 대응하지 못한 게 외환위기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97년 경제위기를 가져온 원인으로 ▦부실기업구조에 대한 대책 미흡 ▦부실금융산업의 구조조정 미흡 ▦대규모 부실채권의 정리계획지연 ▦효율적인 금융감독체계의 미비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공시성 미흡 ▦경제위기 해결을 위한 총체적 리더십 부재 등을 꼽고 있다. DJ정부의 IMF 극복 과정도 처음에는 30년 압축 성장 과정을 거치며 곪을 대로 곪은 경제구조를 뜯어고치자는 것이었다. 수술은 네 갈래로 진행됐다. 부실ㆍ관치로 얼룩진 금융 부문, 빚더미 위에 세워진 재벌, 거대 독과점 틀에 안주해 혈세를 낭비하던 공공 부문, 제로섬(zero-sum)의 극한 갈등을 연출하던 노사 갈등을 개혁하겠다는 것. 성과는 컸다. 획기적인 체질개선 노력으로 ‘IMF 모범생’이라는 전세계의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DJ 정부가 2000년 총선을 5개월 앞둔 99년 11월 ‘IMF 졸업’을 선언하면서 도덕적 해이(모럴헤저드)는 갑자기 그리고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민간 경제연구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99년 이후 ‘외환위기’로만 규정해 정치적 성과와 연계하려 했던 것 같다”며 “이는 경제 구조조정의 종료를 뜻했고 이후 경제개혁의 칼이 무뎌졌다”고 비판했다. 개혁 실패에 대한 자성은 지난 2002년12월 재경부가 외환위기 5주년을 맞아 내놓은 ‘무한한 잠재력, 약속된 미래-IMF 5년의 성과와 과제’란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마디로 “기업ㆍ금융ㆍ공공ㆍ노동 등 4대 부문의 구조조정을 추진했지만 개혁을 반대하는 집단 이기주의로 추진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IMF 구제금융은 비록 아픔이었지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며 “한국경제가 일부 성과는 있었지만 질적인 도약에 실패하면서 신용대란, 부동산 버블 붕괴 및 가계부실화 등 또 다른 형식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입력시간 : 2006/12/2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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