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아산이 북측으로부터 오는 2052년까지 2,000만평의 토지이용권을 따낸 개성공단 시범단지에서 만든 리빙아트의 냄비가 지난 연말에 날개 돋친 듯이 금세 매진됐다. 또 에스제이테크가 초정밀플라스틱 부품인 유공압 패킹을 생산했다.
5월이면 시범단지 내 15개 전업체가 가동된다는 소식을 들으니 개성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황성옛터 만월대며 정몽주 선생이 순절한 선죽교 같은 고려시대 유적도 찾아보고 싶고 화담 서경덕 선생,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꼽히던 개성의 명기 황진이의 자취도 찾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송도삼절 풍류의 자취 보고파
올해는 관광공사가 앞장서 개성관광을 확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리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임진강을 넘어 불과 1시간이면 찾아볼 수 있는 황진이의 묘도 그 코스에 포함시켰으면 좋겠다.
요즘처럼 정서가 메마른 삭막하고 각박한 시대에 황진이가 남긴 시정 넘치는 풍류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것도 나름대로 뜻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황진이가 벽계수와 서화담을 유혹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30년 수행의 고승이라는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황진이가 소복을 하고 이 지족암을 찾아갔다. 그리고 선사에게 제자로 거둬달라고 간청했다.
지족선사가 보기에 깊은 산중 암자에서 불도만 닦고 살았지만 참으로 이런 절색은 본 적이 없는지라 마치 관세음보살이 현신해 자신의 수행을 시험해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보니 자칭 청상과부라는 젊은 여인의 소복이 비에 젖어 탐스럽게 굴곡진 싱싱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닌가. 지족선사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해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이것이 필시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둔갑한 여우가 틀림없어. 두려운 생각이 든 선사는 열심히 염주를 굴리며 속으로 쉴 새 없이 염불을 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 이게 무슨 일인가. 여자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청상과부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당시 황진이의 나이는 30세 전후였을 것이다.
한창 물이 오른 풍만한 나신을 보자 선사는 눈알이 팽팽 돌아 미칠 것만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선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청상과부 아닌 황진이에게 덤벼들었다. 그렇게 해서 지족선사의 30년 수행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황진이가 그 다음으로 도전(?)한 상대는 저 유명한 도학자 서화담이었다. 어느 날 황진이가 서화담을 찾아왔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생각을 않고 있더니 갑자기 “아이고 배야! 아이고 나 죽네!”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뒹구는 것이었다. 물론 꾀병이었다.
서화담이 한채밖에 없는 자신의 이부자리를 깔아주고 그 위에 눕혔다. 황진이의 비명은 잦아든 대신 신음으로 바뀌었는데 그 신음이 마치 사내를 유혹하는 교성처럼 요상했다.
서화담은 옆방으로 건너가 밤늦게 책을 읽었다. 황진이가 이 영감이 언제 건너와 덮치려나 하고 쉴 새 없이 교태성 신음을 날려보냈으나 서화담은 밤새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해서 첫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 황진이가 또 서화담에게 찾아갔는데 그날은 비 오는 날이었다. 황진이는 먼저 지족선사에게 써먹어 성공한 그 수법을 다시 동원했다.
"개성관광사업 확대" 기대감 커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비에 흠뻑 젖어 육감적인 곡선이며 터질 듯이 팽팽한 속살이 훤히 비쳐보이는 차림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도 서화담은 꿈쩍하지 않았다. 황진이가 온갖 절기와 비기를 다 펼쳐 교태를 부려도 빙긋이 웃기만 한 채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천하의 황진이도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진이가 숱한 염문과 남녀간의 사랑에 관한 시들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황진이는 우리나라의 빼어난 산수경관을 사랑해 자연을 소재로 구슬같이 아름다운 시도 많이 읊었다. 황진이가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언제 죽었는지도 불분명하다. 40대에 죽었다고도 하고 60이 넘어 죽었다는 설도 있다.
남한에는 그녀의 유적이 없고 그녀의 묘가 있는 북한 땅 판문군이 건너다보이는 임진각에 가면 조각공원 안에 그녀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지난 82년에 세운 황진이시가비가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