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독일 폭스바겐 디젤 차량의 성능 조작사건을 둘러싸고 전 세계가 시끄럽다. 여러 언론이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폭스바겐은 일부 디젤 차량의 배기가스 소프트웨어를 조작해왔다. 해당 차량이 평소 내뿜는 유해 배기가스가 환경청 허용 기준의 40배가 넘는다고 하니, ‘클린 디젤’을 표방하며 자사 제품의 우수성을 강조해온 폭스바겐으로선 치명타를 입은 셈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폭스바겐의 신뢰도가 추락하면서 문제가 된 차종뿐만 아니라 아우디와 스코다 등 폭스바겐 전 계열사 차량의 판매가 세계적으로 급감하는 추세다. 폭스바겐은 판매 급감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 외에도 전 세계에서 판매된 수백만 대의 문제 차종에 대해 리콜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 각국으로부터 엄청난 벌금과 보상금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종국엔 회사가 존폐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란 전망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 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제조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독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독일 사람들은 거짓말을 못 하고 철저히 규칙에 따라 일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말이다. CEO를 비롯한 많은 임직원이 이 사기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장차 형사 처벌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전 세계를 상대로 이런 대규모 사기극을 벌였는지 그들의 머릿속이 자못 궁금해질 뿐이다.
더 놀라운 점은 마틴 빈터콘 전 폭스바겐 CEO가 사건 초기 ‘이 사기극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며 변명만 되풀이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엄청난 사기극을 CEO가 몰랐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양 ‘유감이다’로 끝난 사과도 영 시원찮은 느낌이었다. 책임지는 CEO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임기 하루를 앞두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CEO직에서 물러났다.
과거 사례를 보면 폭스바겐 사건보다 더한 경우도 있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 건을 살펴보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금융사들의 경영환경이 악화되고 있던 2007년 12월, 당시 세계 최고 투자은행이었던 리먼 브라더스는 갑자기 CFO를 교체해 주목을 받았다.
리먼 브라더스의 새 CFO에 오른 이는 놀랍게도 43세에 불과한 미모의 여성 사내변호사 에린 캘런이었다. CFO를 맡을 만한 직급에 있지도 않았으며, CFO를 맡을 역량도 없었던 그가 갑자기 대폭 승진해 CFO를 맡게 되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에린 캘런은 2008년 초, 2007년 4분기 실적발표에서 처음 그 모습을 공식 석상에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리먼 브라더스의 장밋빛 앞날을 늘어놓았다. 어려운 상황은 다 해결됐고, 앞으로는 실적 개선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긍정 일변도의 발표가 끝나자 발표회장의 애널리스트들과 기자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필자는 CFO가 실적 발표를 하고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얘기는 이 경우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리먼 브라더스는 에린 캘런의 실적발표 직후 하루 동안 무려 15%나 주가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에린 캘런의 낙관적인 전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허구임이 드러났다.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2008년 6월 초, 직책을 맡은 지 불과 6개월 만에 CFO 자리를 사임하고 리먼 브라더스를 떠났다. 몇 달 후에는 리먼 브라더스도 파산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발표하자 개인투자자들은 에린 캘런을 상대로 법률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회사가 아닌 개인에게 소송이 제기된 아주 드문 경우였다. 법률을 잘 아는 변호사인 그가 자신의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송을 당한 것이었다.
이 사건의 전개과정을 보면 당시 리먼 브라더스 최고경영진의 속셈이 훤히 눈에 보인다. 어려운 회사 사정을 감추기 위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한 인물을 골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전문성은 애당초 필요 없었다. 섹시하고 옷을 잘 입으며 언변이 화려해서 언론의 관심을 받을만한 여성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재무업무와 별로 관련도 없는 에린 캘런을 허수아비 CFO로 내세운 것이었다.
물론 이런 노력은 다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진실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스탠포드대학 회계학과의 레이커 교수와 티안 연구원은 에린 캘런의 실적발표 내용을 분석해 주목을 받았다. 놀랍게도, 에린 캘런은 기업 실적이 어떻다는 구체적인 수치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애매한 표현을 반복해 사용했다. 예를 들면 ‘Strong’이라는 단어를 24회, ‘Great’를 14회, ‘Incredible’을 8번 사용했다.
에린 캘런이 한 실적발표는 구체적인 수치나 도표가 발표 내용의 주를 이루는 일반적인 실적발표와 거리가 멀었다. 당시 실적발표 자리에 있었던 이들은 에린 캘런의 발표 내용을 듣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름다운 여성의 화려한 언변에 취해 당연히 알아채야 할 것을 놓치고야 말았다.
공시 관련한 연구들을 보면, 기업들은 좋은 실적이나 장밋빛 미래가 확실할 때 대부분 구체적인 수치를 같이 제시한다. 구체적인 수치가 더 신뢰를 줄 수 있고 전달하려는 정보도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쁜 실적이나 잿빛 미래를 이야기할 때는 구체적인 수치가 잘 등장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뉴스에 대해서도 공시를 하지 않는 것보단 이렇게 애매하게 돌려서라도 공시를 하는 것이 더 좋다. 주가도 덜 떨어지고 소송 위험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도 숨김없이 공개한다는 투자자들의 신뢰도 쌓을 수 있다.
기업에서 최고경영진은 소비자나 일반 대중과 종종 접해야 한다. 특히 회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일이 발생했을 땐 더더욱 그렇다. 그럴 땐 진실성과 즉각성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아주 잘 꾸며진 거짓말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사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거나 핑계를 댈 생각은 버리고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소통해야 한다. 한국의 경영대가로 뽑히는 김효준 BMW코리아 대표가 ‘소통은 기술이 아니라 진정성’이라는 말을 남긴 바 있는데, 이는 되새겨 볼 만한 얘기다. 미국의 포드 대통령은 ‘남들이 보지 않을 때 그 사람의 성품이 드러난다’고 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도 ‘내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있고, 내 마음에는 도덕법칙이 있다’는 말을 남겼다. 어떤 상황이든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진정성 있는 자세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단기간에는 손해를 볼 수도 있겠지만, 장기간으로 보면 결국 이런 진정성을 가진 사람이나 기업이 성공하기 마련이다. 진정성 있는 친구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친구이듯이, 진정성을 가진 기업이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업이란 얘기다. 한동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승승장구하던 폭스바겐이 존폐의 위기에 처한 것을 보더라도,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나고 정의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