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부패와 인플레의 귀결…국민당 패주



1949년 12월7일, 중국 국민당 정권이 천도 계획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말이 천도(난징→타이베이)지 내용은 패주(敗走). 도망친 것이다. 장제스(蔣介石)는 대륙에 남아 항전을 계속한다고 공언했으나 불과 3일 뒤인 10일 전용기 메이링(美齡)호를 타고 타이완 섬으로 쫓겨 들어왔다.

미국 지원 아래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했던 국민당군은 왜 홍군(紅軍·공산군)에게 패했을까. 세 가지가 꼽힌다. 군사적 착오와 부정 부패, 경제난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장제스의 20년 연하 아래인 부인 쑹메이링의 친정인 쑹(宋)씨 가문을 비롯한 4대 가문이 온갖 부정으로 행정과 금융, 언론을 장악하며 해마다 국내총생산(GDP)의 10~12%씩 부를 쌓아가는 동안 나라 재정은 피폐해지고 대중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일본 제국주의가 1945년 패망한 이래 본격화한 내전에서 수차례의 결정적 승기를 놓쳐버린 장제스의 판단 착오도 컸지만 국민당 패주의 제1 원인은 경제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중국의 공산화를 지켜본 외교관,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를 살펴보자. ‘국민당 정부의 붕괴에는 군사적 무능보다 인플레이션 문제가 더 크게 작용했다.’


인플레이션은 항일 전쟁기간 내내 중국을 괴롭혔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소 두 마리를 살 수 있었던 100위엔의 구매력이 1945년에는 달걀 두 알로 떨어졌다. 물가 상승률로 치면 21만2,690%. 돈의 가치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미국의 경제사가 피터 번스타인이 지은 ‘황금의 지배’에는 중일전쟁 중 미군 수송기가 중국 지폐를 실어나르기 위해 탄약과 군수물자ㆍ식량 보급에 차질을 빚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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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승전 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외환ㆍ무역 자유화를 서두르는 통에 미국산 상품이 밀려와 빈약한 생산기반을 갉아먹었다. 홍군과의 내전에 대비하기 위해 남발한 화폐로 초(超)물가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법정화폐와 구 일본 점령지역 괴뢰정부가 발행한 화폐간 교환비율, 미국 달러화와 환율도 지역마다 달라 혼란을 부추겼다.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던 대표적인 도시인 상하이에서는 물가가 하루에 30배씩 뛰기도 했다. 최후의 카드로 꺼낸 1948년 여름의 통화개혁으로도 물가고는 잡히지 않았다. 100위엔의 구매력도 1949년에는 휴지 한 장으로 내려앉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국영기업과 일본이 남긴 적산기업도 부패한 관료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결국 생활고와 부패에 지친 중국인들은 국민당 정권에 등을 돌렸다. 병력 430만명에 항공기 500여대, 전차 1,400여대를 보유한 막강 국민당군은 두 가지 적, 기본무장조차 빈약했던 98만명의 홍군과 경제난에 무너진 셈이다.

대륙을 내준 장제스는 대만에서 부패 척결과 경제 성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매달렸다. 오늘날 대만의 내실 있는 경제가 이때부터 싹텄다. 진작부터 그랬더라면 허망하게 패주하지는 않았을 것을./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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