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돈 돈…. 18세기 내내 영국은 재정난에 시달렸다. 전쟁 탓이다. 유럽과 인도, 북미에서 프랑스와 겨뤄 ‘최초의 세계대전’으로도 불리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남은 것은 1억 4,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채무. 아메리카 식민지 13개 주를 상실한 미국독립전쟁에서는 3억 파운드 이상의 빚이 쌓였다.
마침 해상을 장악한 무역과 산업혁명 초기의 활황으로 적자를 메워 나갔으나 대형 악재가 또 터졌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의 파급을 막으려 육군과 해군을 정비하고 ‘대불동맹(對佛同盟)’의 기치 아래 뭉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지원하는 데 돈이 끝없이 들어갔다.
영국의 선택은 조세 강화.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 수상이 이끄는 내각은 짜낼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동원해 세목(稅目)을 만들어냈다. 유산 상속세에서 사냥용 개에 대한 견세(犬稅), 수출입 상선에 대한 호송세는 물론 가발을 착용할 때 바르는 헤어크림과 의복에까지 세금을 매겼지만 세수 증가는 기대를 밑돌았다.
피트 수상은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재정난의 중압감 속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피트 수상을 떠올리며 묘안을 내세웠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소득세(Income Tax)’ 도입이 필요하다는 장황한 연설 끝에 소득세 법안은 1798년 12월 4일 의회를 간신히 통과했다. 소득세는 말 그대로 개인의 소득에 부과하는 세금. 중국에서 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이 서기 10년께 소득세를 매기고 영국에서도 100년 전쟁과 헨리 8세 시기에 한시적으로 소득세를 거뒀다는 기록이 있지만 근대적 개념의 소득세는 소(小) 피트 수상 재임기의 영국에서 첫선을 보였다.
피트가 제시한 대로 연 수입 60파운드 이상의 고소득자들에게 세율 8.33~10%를 적용한 소득세는 저항에 부딪혔다. ‘재산권 침해’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아 연간 1,000만 파운드의 세수를 예상한 피트의 계산과 달리 실제 징수액은 600만 파운드 수준에 그쳤다. 결국 1802년 폐지됐지만 소득세로 상징되는 영국의 전시 조세행정은 프랑스를 꺾는 힘으로 작용했다. 인구 3,000만명 대 1,600만의 열세에서도 영국은 세금과 금융(국채 발행)을 통해 프랑스보다 두 배 이상의 전비를 조달해냈다.
영국에서 소득세는 1842년 로버트 필 수상 재임기에 되살아나 만성적 적자에 허덕이던 재정을 건전하게 만들고 1874년 영구적 세금으로 굳어졌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초기인 1861년 링컨이 북군의 전비 조달을 위해 도입한 뒤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며 연방법원의 위헌 판결까지 받았지만 1913년부터 항구적 세원으로 자리잡았다. 법인세도 여기서 나왔다. 소득세가 개인소득세와 기업소득세로 분화하고 후자의 명칭이 바뀐 게 법인세다.
‘부자에 대한 징벌’이라는 논란 속에 제도로 정착하기까지 영국은 76년, 미국은 53년 동안 소득세는 ‘나라를 위한 세금’이라는 인식을 각인시키려 애썼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에서는 법인세율이 최고 80%까지 이르렀을 때에 ‘나라를 위해 세금을 내라’고 강조했었다. 언제든지 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는 인화성 높은 주제인 세율은 내년 이후 총선과 대선이라는 정치의 계절을 맞아 논란이 가열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논란을 낳았던 조세 정의와 세율 문제에 합의점을 찾으려면 우리도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오랜 세월의 갈등을 겪어야 하는지 걱정부터 앞선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