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에서 12년 만에 좌파 포퓰리즘 정권이 무너지고 시장 친화적인 경제개혁을 내세운 중도 보수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인기영합적인 정책 노선)'가 타격을 받는 동시에 브라질·베네수엘라 등 다른 중남미 좌파 블록이 도미노식으로 붕괴하는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2일(현지시간)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통령선거 결선 투표에서 보수 우파 성향의 야당인 '공화주의 제안당(PRO)'의 마우리시오 마크리(56) 후보가 51.5%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집권 여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FPV)'의 다니엘 시올리(58)는 48.5%를 얻었다. 마크리 당선자는 "역사적인 날"이라며 승리를 자축한 반면 시올리 후보는 "국민의 뜻"이라며 패배를 시인했다.
건설 재벌의 아들이자 기업가 출신인 마크리 후보는 지난 1995년부터 12년간 축구 클럽인 보카 주니어스 구단주를 하며 인기를 얻었으며 그 여세를 몰아 200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에 당선된 뒤 우파 정당을 결성해 대권에 도전했다. 대통령 취임일은 다음달 10일이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변화'를 선택하면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의 12년에 걸친 부부 대통령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됐다. 이들 부부는 보호무역주의, '퍼주기식' 사회복지 정책 등 이른바 페론주의 정책으로 경제난을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률은 25%에 달하고 내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7%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채무 재조정을 거부한 미국계 헤지펀드와 소송을 벌이는 바람에 기술적 디폴트(채무불이행)에 처했고 국제 자금조달 시장이 거의 막히면서 외환보유액은 9년 만에 최저치로 감소한 상태다.
반면 마크리 후보는 자유시장주의와 개방경제를 표방하고 있다. 그는 외환시장 개입 자제와 페소화 가치 절하 유도, 수출세 인하 등을 통한 수출 경쟁력 회복, 외국인 자금유치를 위한 미국계 헤지펀드와의 협상, 앞으로 10년간 200만개 일자리 창출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마크리 후보의 승리는 국제 경제·외교질서에도 지각변동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과거 갈등을 빚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 미국·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의 승리로 중남미 좌파 포퓰리즘 연대에도 큰 균열이 생기게 됐다. 이미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탄핵 압력에 처해 있고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다음달 6일 의회 선거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마크리 후보는 인권탄압 등을 이유로 베네수엘라를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해 볼리비아 등 다른 좌파 국가의 반발을 사고 있다.
다만 마크리 후보의 승리에도 페론주의가 종말을 고할지는 불투명하다. 다음 집권당이 의회에서는 소수인데다 우파 정당들도 포퓰리즘 정책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또 1989년과 2001년의 경제위기와 경제혼란은 신자유주의적 정책 탓이라는 국민들의 경계감도 크다. 마크리 후보 역시 페론주의자는 아니지만 선거 기간에 정부 효율화, 경제성장을 내세웠을 뿐 빈곤층에 대한 현금지급 등을 중단할 계획은 없다고 밝힌 상태다. 국민적 반발을 우려해 점진적 경제개혁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마크리 후보가 야당과의 '허니문' 기간인 임기 첫 몇 달간 고통스런 개혁조치를 속도감 있게 실행하지 못할 경우 결국 포퓰리즘에 발목을 잡힐 것이라는 경고가 많다. 실제 1940년대 페론 정권 이후 임기 말에 페론주의 정책을 실시하지 않은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게 블룸버그의 설명이다. /뉴욕=최형욱특파원 choihuk@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