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그리는 일은 신성한 국가행사 중 하나였다. 어진은 왕과 '동급'이었으므로 일반인은 감히 어진을 볼 수조차 없었다. 어진에서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터럭 한 올도 달라서는 안 된다'는 사실성이 강조됐지만 왕조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그 상징적 기능에 입각해 과거로부터 전승된 '전형적 표현양식'이 중시됐다. 그런데 이런 전통을 깬 임금이 있었다.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였다.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고종은 권력 강화를 위해 어진 전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왕"이라며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모를 바깥에 알리기 위해 스스로 상복 차림으로 서양인의 카메라 앞에 섰다"고 이야기한다. 책은 "고종의 초상 이미지는 그 자체가 조선을 상징하는 이미지"라는 설명과 함께 고종이 어떻게 자신의 이미지를 활용하고자 했는지, 또 대중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을 분석해 한국 근대미술의 형성과정을 진단했다. 문호를 개방해 신문물을 받아들인 고종은 1884년 서양인 퍼시벨 로웰의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 뿐 아니라 삽화나 판화 등 다양한 형태로 고종의 초상 이미지는 복제되고 유포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종이 쥐고 있던 황실 이미지 운용의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고 만다. 2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