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정감사에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화폐개혁(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 공론화와 공감대 형성을 전제로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치면서 찬반 논란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화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환율이 달러당 1,000원을 넘는 유일한 나라일 정도로 화폐단위가 크다. 우리나라는 1950~1960년대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00대1,10대1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적이 있다. 참여정부 박승 한국은행 총재 시절에도 하향조정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도 했었다. 화폐단위 하향조정은 거래가 편리해지고 대외 위상을 제고하고 인플레이션과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 찬성론이 있는가 하면 화폐교체·전산 업그레이드 비용, 검은돈의 해외유출 우려, 침체기 경제 혼선 가중 등에 따른 반대론이 맞서고 있다. 찬반양론을 게재한다.
찬성-이병완 영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국제결제·환산 간편, 원화 위상 높아져
● 달러 교환가치 4자리… 싸구려 화폐 오명
● 1000대 1로 교환땐 발행비용도 절감
● 결제시스템 편의↑, 장기적으론 이득
지난 50여년 동안 우리나라 물가는 약 34배 올랐고 그에 따라 돈의 구매력은 약 34분의1로 쪼그라들었다. 동전을 보면 1원짜리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고 10원짜리마저 점점 사용량이 줄고 있으며 100원짜리는 대개 거스름돈이 필요할 때만 사용돼 구매력을 가진 돈으로 여겨지기 어려울 정도다. 가격이 꾸준히 올라 사용되는 화폐량도 덩달아 많아져 그에 따른 불편함과 거래비용도 늘어났다.
지난 50여년간 미국의 물가는 7.6배 오르는 데 그쳤다. 원·달러 환율은 장기적으로 이러한 물가상승추세 격차를 반영하기 마련이어서 1970년대 500원에 못 미치던 수준에서 어느덧 4자리 숫자에 안착하는 흐름이 20년 가까이 지속됐다. 미국 돈 100달러짜리 1박스하고 우리 돈 만원짜리 12박스하고 맞먹는 비율로 엄청난 규모의 거래를 매일 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물가상승과 환율상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장부정리와 회계업무에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들이게 됐다.
자국 화폐 기본단위의 교환가치가 기축통화인 달러 대비 4자리 숫자 이상인 나라는 많지 않다. 50위권에 드는 경제규모의 국가 중에는 이란·인도네시아·베트남 정도가 있을 뿐이다. 지난 50여년간 우리 경제규모는 450배 이상 증가, 세계 15위권 규모를 갖췄고 7위권의 교역규모를 자랑하게 됐지만 원화는 3자리도 아니고 4자리의 교환비율로 싸구려 화폐의 대명사로 손꼽히고 있다. 반면 스웨덴과 스위스의 경우 경제규모 순위에서 우리나라에 못 미치지만 이들의 통화는 달러화·유로화·엔화 등과 함께 주요 8대 통화로 대접받고 있다.
우리 경제는 최근 수출·수입을 합쳐 연간 국내총생산(GDP)과 엇비슷한 규모의 국제 결제를 필요로 한다. 경상수지에 잡히는 각종 실물 및 서비스 거래를 모두 포함하면 연간 1조달러가 훨씬 넘는 거래규모다. 이제 화폐교환을 통해 우리 돈의 국제시장에서의 교환비율을 적절히 재조정(reset)할 때가 됐다. 우리 경제의 위상에 맞게 제자리를 잡아줘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할 거면 10대1은 안되고 100대1도 약하고 1,000대1이 기본이다. 1,000대1이면 앞으로 적어도 100년 이상은 화폐단위 교환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통일 등의 이유로 갑자기 통화발행량이 늘어나더라도 발행비용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 교환에 따른 인플레이션 효과, 소비 효과 등을 지적하지만 화폐교환에 대한 정보가 워낙 투명하고 신속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기 때문에 영향은 매우 미미할 것이다. 화폐교환은 가격 절하와 함께 소득 또한 절하시키므로 그에 따른 심리적 효과를 완화하기 위해 화폐명칭 변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가령 원(won)을 돈(don)으로 바꾸고 '1돈=100전'으로 쪼개서 신화폐 체계를 미국 화폐와 연동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2만원 상당=20돈(20달러), 100원=10전(다임), 50원=5전(니클), 10원=1전(페니) 등이다.
화폐교환에는 물론 불편함과 비용이 따르지만 단기적이고 제한적이다. 기관들의 경우 전산시설 자체는 교체할 필요가 없지만 소프트웨어 세팅을 새로 바꿔야 한다. ATM과 자판기도 구권과 신권 병용기간 내에 단계적으로 교체해나가야 하고 각종 가격표도 바꿔야 한다. 모든 경제주체들이 1,000분의1로 나눗셈을 자주해야 하는 적응기간도 필요하지만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화폐교환에 따른 국민경제적 이득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장기적으로 나타나므로 비용에 비해 그 크기가 월등히 더 크다. 국제결제통화와 환산이 간편해지고 국제시장에서 우리 돈의 신뢰도가 올라가며 전반적인 결제시스템의 편의성이 제고된다. 이와 함께 화폐 발행비용의 장기적 절감 효과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합의확보를 위해 △화폐교환의 목적을 지하자금 양성화 등이 아니라 오로지 화폐 액면가치 절하에만 두고 △교환기간과 구권·신권의 병용기간을 2년 이상 충분히 둠으로써 불편을 최소화하며 △목적과 필요성 및 이점을 국민에게 충분히 홍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보다 원만한 추진을 위해 필요하다면 실시 시점을 수년 후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미룬 상태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한 후 법으로 정해 버리면 된다. 그동안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잘 준비하면 교환에 따른 제반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반대-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기획재정위원회
물가폭등 불러 중산층·서민엔 재앙될 것
● 카드결제 일반화, 잔돈 불편 체감 못해
● 화폐개혁한 남미·북한 양극화 심해져
● 저성장 늪 벗어날 해결책 먼저 찾아야
화폐의 액면단위를 낮추는 화폐개혁(redenomination·리디노미네이션) 논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 화폐개혁을 찬성하는 쪽은 우리 돈의 단위에 '0'이 너무 많이 붙어 골치가 아플 지경이라고 한다.
국민총생산이 1,500조원(명목기준)을 넘을 만큼 경제규모가 커져서 국가 회계에 조만간 '경(京)'이니 '해(垓)' 같은 복잡한 단위를 쓰게 되고 외국 화폐와 교환비율도 0을 세개씩이나 붙이는 경우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우리밖에 없으니 화폐 단위를 경제력 수준에 맞게 고치자는 주장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당시 언급한 지하경제 양성화도 화폐개혁 필요성의 근거로 제시된다.
3,500원짜리 커피값을 '0'을 떼고 3.5원으로 표기하면 좀 편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우리가 잔돈을 전혀 안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대개 신용카드로 결제하기 때문에 화폐 단위로 인해 생기는 불편을 체감하는 경우가 실제 그리 많지도 않다. 무역업자나 외국인들이 환전시 원화의 단위 때문에 겪는 불편함이 있지만 화폐개혁을 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금고 안에 감춰둔 화폐가 시장에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생각도 너무 단순하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 비용에 충당할 지하자금을 끄집어내기 위해 화폐개혁을 했지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화폐개혁을 하면 좋을 몇 가지 이유를 다 합쳐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충격과 부작용이 더 크고 심각하다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지금 화폐개혁이 적절치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서민경제에 미칠 충격 때문이다.
화폐개혁이 물가상승을 동반하리라는 것은 이론상으로나 현실에서나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유럽은 물론 남미의 몇몇 나라들이 실시한 화폐개혁으로 물가가 폭등하면서 양극화가 더욱 심해진 사례를 우리는 충분히 목격했다. 가장 최근 화폐개혁을 단행한 바 있는 북한에서도 쌀값이 59배나 뛰었다고 한다.
커피값 3,500원을 4,000원으로 올리는 것과 3.5원을 4원으로 인상하는 것은 체감도가 전혀 다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이렇게 소비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급격한 물가상승을 불러오기 때문에 더 고약하다.
현재 물가가 0%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식음료품의 물가상승 속도는 매우 빠르다. MB정부 이후 지금까지 실질임금 상승이 거의 정체상태인데다 가계부채·전월세값 등으로 주거비 부담이 더욱 높아진 상태다. 리디노미네이션으로 물가가 더욱 빠르게 상승하면 서민들의 가처분 소득은 더 줄어들고 결국 지갑을 닫아버릴 것이다.
지금 우리 경제의 최대 문제는 저성장이다. 정체된 소득, 가처분 소득 대비 160%의 가계부채 부담, 폭등하는 전월세값, 불안한 일자리 때문에 내수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경기가 회복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산층의 소득이 늘지 않고 소비 여력이 줄어드는 데 있다.
화폐개혁으로 물가가 뛰면 중산층과 서민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 닥칠 수밖에 없다. 여기다 고소득자나 자산가들마저 소비를 줄이거나 돈을 부동산 시장으로 돌리게 되면 한국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얼마 전 연봉 6,000만원의 대기업 부장이 퇴근길에 통닭 한 마리 사는 것을 고민한다는 얘기가 기사화됐다. '장보기가 겁난다'는 주부들의 말은 벌써 몇 년째 반복되는 후렴구다.
'빚내서 집사라'는 부동산 경기부양 정책과 친재벌 정책으로 인해 박근혜 정부 들어 서민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정책은 여건과 타이밍이 중요한데 지금은 민생경제부터 살려야 할 때다.
돈 쓸 때 불편함을 조금 덜고 지하경제 양성화하겠다고 화폐개혁 카드를 꺼내다가 국민경제 전체가 더 큰 불확실성과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서민경제·국민경제를 생각한다면 지금은 물가상승을 불러오는 화폐개혁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 국민들의 지갑을 두툼하게 해서 나라 경제가 하루빨리 저성장의 늪을 벗어나도록 하는 게 먼저다.
찬성-이병완 영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국제결제·환산 간편, 원화 위상 높아져
● 달러 교환가치 4자리… 싸구려 화폐 오명
● 1000대 1로 교환땐 발행비용도 절감
● 결제시스템 편의↑, 장기적으론 이득
지난 50여년 동안 우리나라 물가는 약 34배 올랐고 그에 따라 돈의 구매력은 약 34분의1로 쪼그라들었다. 동전을 보면 1원짜리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고 10원짜리마저 점점 사용량이 줄고 있으며 100원짜리는 대개 거스름돈이 필요할 때만 사용돼 구매력을 가진 돈으로 여겨지기 어려울 정도다. 가격이 꾸준히 올라 사용되는 화폐량도 덩달아 많아져 그에 따른 불편함과 거래비용도 늘어났다.
지난 50여년간 미국의 물가는 7.6배 오르는 데 그쳤다. 원·달러 환율은 장기적으로 이러한 물가상승추세 격차를 반영하기 마련이어서 1970년대 500원에 못 미치던 수준에서 어느덧 4자리 숫자에 안착하는 흐름이 20년 가까이 지속됐다. 미국 돈 100달러짜리 1박스하고 우리 돈 만원짜리 12박스하고 맞먹는 비율로 엄청난 규모의 거래를 매일 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물가상승과 환율상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장부정리와 회계업무에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들이게 됐다.
자국 화폐 기본단위의 교환가치가 기축통화인 달러 대비 4자리 숫자 이상인 나라는 많지 않다. 50위권에 드는 경제규모의 국가 중에는 이란·인도네시아·베트남 정도가 있을 뿐이다. 지난 50여년간 우리 경제규모는 450배 이상 증가, 세계 15위권 규모를 갖췄고 7위권의 교역규모를 자랑하게 됐지만 원화는 3자리도 아니고 4자리의 교환비율로 싸구려 화폐의 대명사로 손꼽히고 있다. 반면 스웨덴과 스위스의 경우 경제규모 순위에서 우리나라에 못 미치지만 이들의 통화는 달러화·유로화·엔화 등과 함께 주요 8대 통화로 대접받고 있다.
우리 경제는 최근 수출·수입을 합쳐 연간 국내총생산(GDP)과 엇비슷한 규모의 국제 결제를 필요로 한다. 경상수지에 잡히는 각종 실물 및 서비스 거래를 모두 포함하면 연간 1조달러가 훨씬 넘는 거래규모다. 이제 화폐교환을 통해 우리 돈의 국제시장에서의 교환비율을 적절히 재조정(reset)할 때가 됐다. 우리 경제의 위상에 맞게 제자리를 잡아줘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할 거면 10대1은 안되고 100대1도 약하고 1,000대1이 기본이다. 1,000대1이면 앞으로 적어도 100년 이상은 화폐단위 교환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통일 등의 이유로 갑자기 통화발행량이 늘어나더라도 발행비용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 교환에 따른 인플레이션 효과, 소비 효과 등을 지적하지만 화폐교환에 대한 정보가 워낙 투명하고 신속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기 때문에 영향은 매우 미미할 것이다. 화폐교환은 가격 절하와 함께 소득 또한 절하시키므로 그에 따른 심리적 효과를 완화하기 위해 화폐명칭 변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가령 원(won)을 돈(don)으로 바꾸고 '1돈=100전'으로 쪼개서 신화폐 체계를 미국 화폐와 연동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2만원 상당=20돈(20달러), 100원=10전(다임), 50원=5전(니클), 10원=1전(페니) 등이다.
화폐교환에는 물론 불편함과 비용이 따르지만 단기적이고 제한적이다. 기관들의 경우 전산시설 자체는 교체할 필요가 없지만 소프트웨어 세팅을 새로 바꿔야 한다. ATM과 자판기도 구권과 신권 병용기간 내에 단계적으로 교체해나가야 하고 각종 가격표도 바꿔야 한다. 모든 경제주체들이 1,000분의1로 나눗셈을 자주해야 하는 적응기간도 필요하지만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화폐교환에 따른 국민경제적 이득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장기적으로 나타나므로 비용에 비해 그 크기가 월등히 더 크다. 국제결제통화와 환산이 간편해지고 국제시장에서 우리 돈의 신뢰도가 올라가며 전반적인 결제시스템의 편의성이 제고된다. 이와 함께 화폐 발행비용의 장기적 절감 효과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합의확보를 위해 △화폐교환의 목적을 지하자금 양성화 등이 아니라 오로지 화폐 액면가치 절하에만 두고 △교환기간과 구권·신권의 병용기간을 2년 이상 충분히 둠으로써 불편을 최소화하며 △목적과 필요성 및 이점을 국민에게 충분히 홍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보다 원만한 추진을 위해 필요하다면 실시 시점을 수년 후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미룬 상태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한 후 법으로 정해 버리면 된다. 그동안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잘 준비하면 교환에 따른 제반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반대-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기획재정위원회
물가폭등 불러 중산층·서민엔 재앙될 것
● 카드결제 일반화, 잔돈 불편 체감 못해
● 화폐개혁한 남미·북한 양극화 심해져
● 저성장 늪 벗어날 해결책 먼저 찾아야
화폐의 액면단위를 낮추는 화폐개혁(redenomination·리디노미네이션) 논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 화폐개혁을 찬성하는 쪽은 우리 돈의 단위에 '0'이 너무 많이 붙어 골치가 아플 지경이라고 한다.
국민총생산이 1,500조원(명목기준)을 넘을 만큼 경제규모가 커져서 국가 회계에 조만간 '경(京)'이니 '해(垓)' 같은 복잡한 단위를 쓰게 되고 외국 화폐와 교환비율도 0을 세개씩이나 붙이는 경우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우리밖에 없으니 화폐 단위를 경제력 수준에 맞게 고치자는 주장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당시 언급한 지하경제 양성화도 화폐개혁 필요성의 근거로 제시된다.
3,500원짜리 커피값을 '0'을 떼고 3.5원으로 표기하면 좀 편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우리가 잔돈을 전혀 안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대개 신용카드로 결제하기 때문에 화폐 단위로 인해 생기는 불편을 체감하는 경우가 실제 그리 많지도 않다. 무역업자나 외국인들이 환전시 원화의 단위 때문에 겪는 불편함이 있지만 화폐개혁을 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금고 안에 감춰둔 화폐가 시장에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생각도 너무 단순하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 비용에 충당할 지하자금을 끄집어내기 위해 화폐개혁을 했지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화폐개혁을 하면 좋을 몇 가지 이유를 다 합쳐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충격과 부작용이 더 크고 심각하다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지금 화폐개혁이 적절치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서민경제에 미칠 충격 때문이다.
화폐개혁이 물가상승을 동반하리라는 것은 이론상으로나 현실에서나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유럽은 물론 남미의 몇몇 나라들이 실시한 화폐개혁으로 물가가 폭등하면서 양극화가 더욱 심해진 사례를 우리는 충분히 목격했다. 가장 최근 화폐개혁을 단행한 바 있는 북한에서도 쌀값이 59배나 뛰었다고 한다.
커피값 3,500원을 4,000원으로 올리는 것과 3.5원을 4원으로 인상하는 것은 체감도가 전혀 다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이렇게 소비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급격한 물가상승을 불러오기 때문에 더 고약하다.
현재 물가가 0%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식음료품의 물가상승 속도는 매우 빠르다. MB정부 이후 지금까지 실질임금 상승이 거의 정체상태인데다 가계부채·전월세값 등으로 주거비 부담이 더욱 높아진 상태다. 리디노미네이션으로 물가가 더욱 빠르게 상승하면 서민들의 가처분 소득은 더 줄어들고 결국 지갑을 닫아버릴 것이다.
지금 우리 경제의 최대 문제는 저성장이다. 정체된 소득, 가처분 소득 대비 160%의 가계부채 부담, 폭등하는 전월세값, 불안한 일자리 때문에 내수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경기가 회복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산층의 소득이 늘지 않고 소비 여력이 줄어드는 데 있다.
화폐개혁으로 물가가 뛰면 중산층과 서민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 닥칠 수밖에 없다. 여기다 고소득자나 자산가들마저 소비를 줄이거나 돈을 부동산 시장으로 돌리게 되면 한국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얼마 전 연봉 6,000만원의 대기업 부장이 퇴근길에 통닭 한 마리 사는 것을 고민한다는 얘기가 기사화됐다. '장보기가 겁난다'는 주부들의 말은 벌써 몇 년째 반복되는 후렴구다.
'빚내서 집사라'는 부동산 경기부양 정책과 친재벌 정책으로 인해 박근혜 정부 들어 서민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정책은 여건과 타이밍이 중요한데 지금은 민생경제부터 살려야 할 때다.
돈 쓸 때 불편함을 조금 덜고 지하경제 양성화하겠다고 화폐개혁 카드를 꺼내다가 국민경제 전체가 더 큰 불확실성과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서민경제·국민경제를 생각한다면 지금은 물가상승을 불러오는 화폐개혁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 국민들의 지갑을 두툼하게 해서 나라 경제가 하루빨리 저성장의 늪을 벗어나도록 하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