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루르의 교훈, 미소가 鐵血보다 강하다




1923년 1월 11일, 프랑스와 벨기에군 병력 6만여 명이 독일 국경을 넘었다. 목적지는 루르(Ruhr). 유럽 최대의 산업단지를 독일은 속수무책으로 내줬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가였기에 내세울 명분도, 맞서 싸울 병력도 없었다.

프랑스는 왜 같은 연합국인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 아랑곳없이 루르 점령에 나섰을까. 무엇보다 독일에 대한 원한이 컸다. 애당초 독일 지역은 프랑스가 몇 수 아래의 열등한 곳으로 간주하던 지역. 허울뿐인 신성로마제국의 깃발 아래 수백 개 작은 나라들로 분열된 독일을 얕잡아 봤으나 독일 지역의 맹주로 부상한 프로이센에 두 번 당했다는 상처를 갖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말기 영국과 프로이센에 당하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완패,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알자스·로렌을 강제 할양했던 프랑스로서는 독일의 싹을 누르고 싶었다. 더욱이 1차 세계대전에서 서부전선 전투의 대부분이 프랑스 국토 안에서 벌어져 독일에 대한 증오심이 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독일이 다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배상금을 받아야겠다고 작심한 프랑스는 연합국 전체 배상금의 52%를 배정받았으나 막상 배상 능력이 못 따랐다. 정화(금 마르크) 배상이 어렵자 독일에 배상금의 일부로 전신주 10만 개를 요구한 프랑스는 독일 측이 일찍 찾아온 강추위 탓에 납품 기일을 어겼다는 이유로 루르에 군대를 보냈다.

루르 공업지대에서 생산품을 현금 배상으로 가져가겠다는 프랑스의 계산은 빗나갔다. 원자재가 늘 모자랐던 데다 독일 고용주들과 노동자들이 뭉쳐서 태업과 파업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바이마르 정부도 노동자들을 측면 지원하고 나섰다. 생계를 지원한다며 마르크화를 마구 찍어낸 것. 얼마 안 지나 독일 전역은 초인플레이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뜩이나 패전 이후 물가 상승세와 마르크화 약세에 시달리던 상황. 1차 대전 이전까지 1달러에 4.2마르크를 유지했던 환율이 루르 점령 직전에 1만 마르크로 뛴 상태에서 루르 점령 당일 1만 8,000마르크로 올랐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독일 정부는 태업 중인 노동자들의 최저 생활 수준을 위한다며 더 많은 돈을 찍었다.


화폐 공급 확대는 마르크화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미화 1달러에 대한 독일 마르크화의 환율은 10월에는 40억 마르크, 11월 말에는 4조2,000억 마르크로 치솟았다. 영국의 언론인이며 역사학자인 폴 존슨 교수가 20세기를 기록한 저작 ‘모던 타임스’에는 1923년 여름 독일을 방문한 미국 의원 앤드루가 7달러를 환전하여 40억 마르크를 받아 점심값으로 15억 마르크, 팁으로 4억 마르크를 줬다는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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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은 어른 허리춤까지 쌓인 돈다발로 블록쌓기 놀이를 하고 지폐를 붙여 연을 날렸다. 한 푼 두 푼 모아 저축한 쌍둥이 형보다 돈이 생길 때마다 술을 사 먹은 동생이 빈 병을 팔아 훨씬 많은 돈을 남겼다는 웃기고도 슬픈 시대는 또 다른 증오심을 낳았다. 독일인들의 가슴에 프랑스에 대한 원한이 쌓여갔다.

루르 점령을 강행한 프랑스도 이익을 얻지 못했다. 병사들은 늘 스트레스와 공포에 떨고 물건으로 대납받은 배상금은 주둔 비용을 밑돌았다. 결국 루르 점령을 강행한 푸앵카레(‘푸앵카레의 추측’으로 유명한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의 6살 연하 사촌 동생)의 보수당 정권도 무너지고 프랑스군은 결국 루르를 떠났다.

프랑스군 점령 2년 3개월간 루르의 생산력은 3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다. 130명의 독일 민간인이 총칼에 맞아 죽고 2,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15만 명이 추방령을 받고 쫓겨났다. 누구도 이익을 얻지 못한 루르 점령은 더 큰 재앙을 낳았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승리의 평화적 귀결(1920)’에서 경고한 대로 독일에 대한 가혹한 배상금 부과로 야기된 루르 점령과 증오의 악순환은 20년이 채 안 지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프랑스군의 철수에 앞서 단행된 화폐 개혁으로 독일의 초 물가고는 잡혔어도 마음속에 새겨진 독일인들의 응어리는 경제 부흥과 ‘위대한 아리안족’을 주창한 히틀러에게 급속하게 기울었다. 루르 점령으로 야기된 경제 혼란과 민족적 자긍심의 상처가 없었다면 히틀러의 등장도, 2차 세계대전의 참화도 피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루르 지역을 차지하려다 독일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프랑스의 노림수는 두 가지. 독일의 힘을 약화하는 동시에 ‘최적화 산업 단지’를 구축하고 싶었다. 프랑스 최대의 철강 산지인 알자스 로렌 지역과 유럽 최대의 탄전을 자랑하는 루르를 묶으면 세계 최고의 산업단지가 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 간 영토와 자원을 둘러싼 해묵은 원한은 이제 옛날 얘기다. 두 나라는 내가 못 가진 것을 남에게 빼앗기 위해 피 흘리기보다 서로 나누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1952년에 탄생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 오늘날 유럽연합(EU)의 모태다.

극과 극, 증오와 증오의 산물이었던 루르 점령과 알자스 로렌을 둘러싼 프랑스와 독일간 갈등과 해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분명한 시사점을 말해준다. 악수와 미소, 소통과 협력의 힘은 무기와 폭력, 철혈(鐵血)보다 훨씬 강하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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