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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가에는 일찍부터 '대머리 법칙'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역대 크렘린 궁을 차지한 인물을 살펴보면 대머리 지도자들이 번갈아가며 권력을 잡아왔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레닌은 젊을 때부터 대머리였고 검은 머리의 이오시프 스탈린을 건너뛰면 니키타 흐루쇼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리스 옐친 등의 모발 상태가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역시 대머리인데다 레닌과 이름이나 통치 스타일이 엇비슷해 집권 초기 '레닌의 환생'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닮은 구석이 적지 않다.
푸틴은 지금도 레닌의 집무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붉은 광장의 레닌 유해가 꿋꿋이 버티는 것도 푸틴의 역할이 크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레닌의 묘를 없애고 시신을 매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푸틴은 '성인의 유골을 모시는 세계적 종교의 전통에 따른 것'이라며 극구 반대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매년 200만달러를 들여 레닌 묘를 정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푸틴으로서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국부(國父)'로 자리 잡고 있는 레닌의 명성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랬던 푸틴이 레닌을 공개 비판하고 나서 뒷말을 낳고 있다. 푸틴은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의 꿈이 좌절됐으며 연방주의를 고집해 오늘의 분열 사태를 초래했다고 꼬집었다. 반면 단일국가론을 주창했던 스탈린을 옹호하기도 했다. 서방에서는 유가 급락에 따른 경기 침체로 자신의 장기집권 야망이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막강한 권력을 무기로 헌법을 개정해 왕정 복귀를 꿈꾸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집무실에 최초의 차르인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있다는 푸틴으로서는 오히려 레닌의 빛바랜 추억이 최대의 걸림돌이라는 얘기다. '21세기 차르'로 불리는 푸틴이 곰을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어느 권력자나 전임자를 밟고 넘어가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인 듯하다. /정상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