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의 여름. 조용하던 전라도의 한 섬마을이 왁자지껄해졌다. 학교 다니러 뭍으로 떠났던 ‘범실’, ‘산돌’, ‘개덕’이라는 별명의 남자아이 세 명과 마을 제일의 왈가닥 ‘길자’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들을 누구보다 반갑게 맞이해 주는 건 친구 ‘수옥’이다. 불편한 다리 탓에 홀로 섬마을에 남아야 했던 가엾고 예쁜 여자아이. 영화 ‘순정(24일 개봉)’은 1991년 이 다섯 친구들에게 벌어졌던 잊을 수 없는 17세 여름날의 기억을 23년이 흘러 마흔이 된 후에야 제대로 돌아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공을 뛰어넘어 수없는 감정들이 오가지만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단연 수옥을 향한 범실의 지고지순한 첫 사랑. 좋아하는 수옥이 앞에서 멋있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그저 등만 내어주던 순정남 범실의 역할은 영화 ‘카트’,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도경수(23·사진)가 맡았다. 첫 주연을 맡은 소감을 묻자 “‘순정’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다섯 명 모두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연준석(산돌 역), 이다윗(개덕 역), 주다영(길자 역), 김소현(수옥 역)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고 많이 배웠다”고 먼저 말하는 배우 도경수를 만났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1991년이다.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긴데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나.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영화의 시대를 생각하지 말고 그저 사랑과 우정에 대해서만 생각해라”고 하셨다. 실제로 사랑이나 우정 같은 감정은 시대를 떠나 공통된 것들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시절 노래든, 놀이든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그냥 91년도에는 이런 노래가 인기 있었구나, 받아들였다(웃음). 닭을 잡아 친구들이랑 국을 끓여 먹는 장면 같은 건 낯설지만 신 나는 경험이 됐다. 도시에서는 기껏해야 삼계탕집에 갈 텐데 직접 닭을 잡아 삼계탕을 끓여 먹다니! 내가 절대로 겪어보지 못할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연기는 정말로 재밌다.
■시간이 1991년이라면 공간은 전라도 깊숙한 섬마을이다. 영화 내내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데 어렵지 않았나.
=정말로 어려웠다. 처음에 사투리 레슨을 한 번 받긴 했는데, 모두 서울 출신이라 그런지 입에 잘 익지 않았다. 그래서 그 친구들과 전라도로 내려간 당일 약속한 게 이제부터 우리는 그냥 얘기할 때도 사투리를 쓰자는 거였다. 그렇게 3개월을 카메라가 돌 든 말든 계속 사투리를 썼다. 또 고흥 일대를 일부러 많이 돌아다녔는데 어르신들 말씀하시는 걸 듣고 배우려는 목적이었다. 다행히 서울이 고향이거나 타지방 사람들은 꽤 자연스럽다고 하던데, 진짜 전라도 분들이 보시기에 어떨지 아직 조금 걱정스럽다.
■영화 속에서 지고지순한 첫 사랑을 한다. 그런 첫 사랑을 경험해 본 적 있는지. 있다면 이번 영화를 연기하는 데 도움을 줬는지.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 해봤다. 근데 범실이처럼 첫 사랑 앞에서 쑥스러워하고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고지순함을 연기하는 건 사실 꽤 어려웠다(웃음). 첫 사랑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된 때는 오히려 범실이의 첫 사랑이 끝난 후 찾아온 슬픈 감정을 연기할 때였던 것 같다. 나의 첫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이 먼저 멀어져 끝나 버렸는데, 그때 많이 힘들었다. 그 기억들이 연기에 도움이 된 것 같다.
■다섯 친구로 나오는 배우 중 실제로 가장 나이가 많다. 연장자로서 느끼는 책임감은 없었나.
=일단 스텝 분들이 다 저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아서 내가 현장을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던 것 같다. 그냥 따라가자고 생각했다. 다만 우리 다섯 명의 술자리는 주로 제가 책임졌다(웃음).
■노래만 하기에도 바쁜 것 같은데 굳이 연기를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까.
=연기에서 얻는 기쁨과 가수로 얻는 기쁨은 정말 많이 다른 것 같다. 연기는 특히 좋은 게 정말 나의 이야기, 내 삶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희열을 느낀다. 만약 지켜봐 주는 사람들이 그 감정을 공유해주면 더욱 기쁘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받은 후로는 연기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
■어떤 느낌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SBS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한강우 역할을 맡았는데, 장재열이 한강우의 신발을 신겨주며 떠나보내는 씬이 있었다. 사실 나는 눈물도 별로 없고 울어본 적도 별로 없는데, 그 장면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울컥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알 게 됐다. 마치 ‘울컥’이라는 단어를 얻은 것 같았다. 내가 도경수로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그런 감정들을 드라마나 영화 속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얻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껴진다. 또 주변에서 강우가 정말 안쓰럽고 가엾다, 는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정말로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가수로서 느끼는 기쁨은 어떤가.
=무대에 서면서 느끼는 기쁨은 즉각적으로 팬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니깐 간접적인 반응밖에 없을 수 없지만 무대에서는 정말 에너지가 나를 향해 곧장 오는 기분이다.
■연기 욕심이 많다고 했는데 따로 수업을 받거나 학교에 갈 생각은 없나.
=연기를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은 아직 못 해본 것 같다. 연기를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곳은 현장인 것 같고, 그래서 현장이 곧 학교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현장을 갈 때마다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하고 배운다. 솔직히 저는 운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언젠가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부족한 경험 탓에 엄두를 못 냈고 주변에 티도 안 냈다. 그런데 ‘카트’라는 작품의 캐스팅 디렉터 분이 우연히 저를 보시고 캐스팅을 해주신 거다. 정말로 좋은 기회를 얻어 즐겁게 연기를 했고 그 현장에서 또 많은 것을 배우고 하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현장에서 많은 걸 배운다고 했는데 ‘순정’의 촬영 현장에서는 어떤 가르침을 얻었나.
=일단 연기적인 부분에서 친구로 출연한 동생들의 연기를 보며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고 많이 배웠다. 특히 이번에는 서로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는 점을 배운 것 같다. 어떤 촬영장에 가면 바쁜 일정 등을 이유로 몇 개 무리가 제각각 따로 노는 경우도 많은데 ‘순정’의 촬영현장은 정말 3개월 내내 ‘하나’였다. 튀거나 이기적인 사람 한 명 없이 서로가 서로에 대한 배려를 해줘 정말 좋았고, 그 에너지가 영화에도 좋은 영향을 준 것 같다. 이를테면 우리 다섯 명은 정말 친한데, 그러니깐 스크린 속에서 우리가 노는 게 더 즐거워 보이지 않을까.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장면마다 녹아있는데, 관객들도 그걸 눈여겨 봐주신다면 더욱 고마울 것 같다.
■엑소 멤버 대부분이 연기하고 있는데, 서로 연기에 대한 조언 같은 것도 해주나.
=서로 연기에 대한 조언 같은 건 안 한다. 모니터링은 해주지만 모두 경험이 많지 않으니 ‘내가 감히 어떻게 조언을 해주냐’는 생각을 서로 하는 것 같다. 대신 서로 응원을 참 많이 해준다. ‘이 장면에서 너 정말 좋았다.’라거나 ‘촬영할 때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는 말을 많이 해준다. 무엇보다 멤버 중 1명 빼고는 다들 연기 경험이 있다 보니 현장에서 뭐가 힘든지를 잘 안다. 그러니깐 위로해주는 거다. 멤버끼리 연습하며 서로 대사를 쳐 준다거나 하는 건... 저는 일단 못한다(웃음). 그냥 너무 웃기고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다.
■도경수라는 연기자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
=제가 제 연기를 보면 온통 아쉬울 뿐이지만 주변에서 ‘눈으로 말을 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 감사하고 기뻤다. 단점은 표현력이 부족한 점인 것 같다. 제가 연기하는 인물이 어떤 감정인지 제 안에서는 다 이해가 되고 알 것 같은데 그걸 겉으로 제대로 표현하질 못 한다. 그리고 눈물 연기가 너무 힘들다. 상황에 맞게 빨리 눈물을 흘리고 해야 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사실 이건 도경수라는 사람에게 굉장히 불가능한 일 중 하나다(웃음).
■흥행에 대한 욕심을 말한다면. 또 관객들이 어떤 감정을 받고 극장에 나서길 바라나.
=욕심내서 손익분기점의 딱 두 배만 들었으면 좋겠다. 300만 명이다(웃음). 그리고 보시는 분들이 좋은 감정을 가지고 돌아가신다면 정말 만족스럽고 행복할 것 같다. 특히 제가 연기한 범실이의 순수함과 그 안의 남자다움, 첫 사랑을 겪는 부끄러움과 어떤 안타까움 같은 걸 함께 공유해주신다면 너무나 감사할 것 같다.
사진=송은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