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축하 난(蘭) 수난사



김대중 전 대통령의 76회 생일을 하루 앞둔 2001년 1월5일. 야당인 한나라당의 정태윤 비서실 차장이 난(蘭)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섰다. 김 전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 차장도, 난도 그날 청와대 면회실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문전박대 받았다'며 격앙했고 청와대는 '방문 내용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누구 말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야가 안전기획부 예산의 15대 대선 자금 유입 여부를 놓고 첨예하게 맞섰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세인의 입방아에 올랐다.

생일이나 혼례·개업 등의 축하용으로 흔히 보내는 난초. 하지만 고고한 화초라도 창과 방패가 춤추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중층적 의미가 담긴 사신(使臣)의 역할도 맡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생일을 맞이했던 2003년 9월. 전두환·노태우·김대중 전 대통령은 물론 대선 경쟁자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까지 축하 난을 보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모른 척했다. 대신 "나라가 어려운데 대통령이 보이지 않는다"며 독설을 날렸다.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은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보낸 난을 뒤늦게 발견해 '대통령의 난을 치워버렸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90년대 중반 '킹 메이커'로 불리던 김윤환 당시 신한국당 대표는 여야 대치가 극심했던 시기임에도 DJ의 일산 이사를 축하한다며 난을 보냈다. 아무리 싸움 중이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뜻이었으리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낸 생일축하 난이 우여곡절 끝에 주인을 찾아갔다. 청와대 정무수석의 판단 착오와 계속된 회의로 인한 보고 지연 탓에 생긴 실수라는 게 청와대의 해명이다. 박 대통령도 크게 질책했다고 한다. 생일축하 난 소동은 이렇게 마무리됐지만 의문은 남는다. 누구보다도 정무감각이 뛰어나야 할 이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혹 대통령의 의중을 너무 잘 파악한 탓 아닐까.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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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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