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대박의 꿈 … ‘집보다 꽃’





1637년 2월 5일, 네덜란드 북서부 알크마르의 한 여관에서 벌어진 경매 현장. 튤립 한 뿌리가 5,200길더에 팔렸다. 황소 45마리 값어치와 맞먹는 가격! 사람들은 경악했다. 최고급품도 아닌 그저 고급품의 값이 숙련된 목수의 21년치 연봉에 상당하다니…. 유럽이 제작하는 선박의 3분의 2를 건조하는 네덜란드 조선소에 러시아 황제(표트르 1세)가 위장 취업하며 기술을 베껴가던 시절, 목수는 먹고 살만한 직업이었다.


‘총독’이라고 불렸던 상품의 가격이 이 정도였으니 최고급품인 ‘황제’의 가격은 얼마나 했을까. 마이클 대시가 지은 ‘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에 따르면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쌌다.’ 1636년 12월에 발간된 투자 및 상품 정보지 하나에는 자세한 가격 정보가 전해져 내려온다. 배 1척에 500길더, 살찐 황소 4마리 480길더, 밀 24톤 448길더. 치즈 450㎏ 120길더, 와인 2통(240~630ℓ) 70길더, 맥주 60만㏄ 32길더….

거시지표로도 당시 튤립 가격의 이상 급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튤립 알뿌리에 대한 관심이 치솟았던 1633년부터 1637년까지 네덜란드 전역의 공식·비공식 경매장에서 튤립 거래 추정 총액은 약 4,000만길더. 세계 최대 은행이던 네덜란드 중앙은행의 예치금이 350만길더. 아시아를 주름잡던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투자액이 650만길더였다. 매매에 수만 명이 관련되고 주식처럼 거래되며 알뿌리 재배 농장을 차렸다는 계약서 하나만으로도 자금을 끌어 모았으니 실제 거래액은 추정치보다 훨씬 많았을 수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튤립은 강하게 태어나 자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고귀하고 비싸졌다. 애초 원산지는 척박하고 황량한 중앙아시아.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 고선지가 넘었던 톈산산맥에서 번성했고 오스만튀르크에 전해지며 ‘신의 꽃’이라고 떠받들어졌다.

술탄의 정원에서 보호받던 튤립이 유럽에 전파된 시기는 1550년께. 이스탄불에 주재하던 오스트리아 외교관이 선물 받은 튤립을 옷가지 상자에 넣어 귀국하면서 유럽에서 퍼졌다. 목화씨만큼 반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유럽판 문익점’에 의해 유럽에 들어온 셈이다. 튤립은 이때까지는 최상류층의 전유물이었으나 네덜란드 레이덴대학 의학교수인 클루시우스에 의해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식물학의 개척자로도 기억되는 그는 교배 실험을 통해 다양한 변종을 만들어냈다. 희귀한 색상과 모양에 대한 왕족과 귀족들의 관심은 계층을 넘었다. 부호들이 가세하고 얼마 안 지나 갑남을녀도 뛰어들었다. 희귀종을 잘 키우면 돈이 되고 운이 좋아 더 아름다운 변종이 탄생하면 더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대중의 믿음은 광기로 번졌다.

시대 상황도 튤립 투기를 거들었다. 국토가 작아 좁은 집에서 살던 네덜란드인들의 환경과 성향은 집 한 모퉁이에서 피어나는 튤립과 제격이었다. 한창 잘나가는 동인도회사 주식을 사서 한몫 잡고 싶어도 초고가주를 살 수 없던 사람들은 대체 투자의 심정으로 마당에 튤립을 심었다. 관건은 바이러스. 얼마나 적당한 바이러스가 침투해 그럴싸한 변종을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돈의 단위가 달라졌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한곳으로 바라보는 결과는 경제 급성장으로 나타났다. 당연하다. 초기에는 대부분 알뿌리를 사야 했으니까. 끝없는 가격 상승 속에 일부는 모양이 비슷한 튤립과 양파를 섞어 새로운 튤립을 만들려는 시도까지 나왔다. 반대로 고가의 튤립 알뿌리를 양파라고 착각해 먹어버려 평생을 채무로 시달린 사람도 있었지만.(오늘날 영농 과학화와 주식 거래, 심지어 선물·옵션도 상당 부분 네덜란드 튤립 투기시대에 만들어졌다. 튤립은 그만큼 돈이 되는 투자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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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전역에 분 투기 바람은 한동안 그칠 줄 몰랐다. 고급저택을 튤립과 맞바꿨다는 소문도 돌았다. 1636년 말에는 일주일에 두세 배씩 가격이 뛰었다. 무역으로 유럽 최고의 부자나라가 된 네덜란드에는 외국인 투자자금도 넘치게 들어왔다. 과잉 유동성은 바로바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며 튤립 투자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튤립 불패’ 신화도 생겼다.

마침 흑사병이 나돌아 네덜란드 인구 8분의 1이 사망한 뒤 노동력 부족과 ‘될 대로 되라’는 분위기도 투기를 부추겼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진 튤립의 가격 폭등세가 절정에 달한 것은 1637년 1월. 하루에 두 배씩 상승하는 급등 장세에 사람들은 집과 땅을 팔았으나 마침내 파국이 왔다.

튤립 광풍(Tulip Mania) 당시의 튤립 지수 추이튤립 광풍(Tulip Mania) 당시의 튤립 지수 추이


시장바구니를 든 아줌마부대가 등장하면 주가 상승이 멈춘다고 누가 말했나.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변두리 여관의 경매장에서 그저 상급의 튤립 뿌리가 황소 45마리 가격에 팔린 1637년 2월의 첫째 화요일 이후, 갑작스레 광풍이 멈췄다. 최대 5,000길더 대에 거래되던 ‘총독’급 구근의 가격은 4개월 뒤 30길더로 주저앉았다.

당시의 하락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세계 대공황을 촉발한 1929년 10월말 뉴욕 증시 폭락과의 비교가 말해준다. 세계 대공황 시기에 뉴욕 증시는 2년간 80%가 빠졌으나 1637년 네덜란드 튤립 가격은 4개월 사이에 95~99%가 공중으로 날라갔다. 역사상 최악의 폭락!(약 80년이 흐른 뒤 네덜란드의 ‘선두’ 바통을 물려받아 경쟁하던 영국과 프랑스에서 ‘남해회사 버블’과 ‘미시시피 버블’이 일어났다)

근대적 자본주의 등장 이래 최초의 투기 사례로 지목되는 튤립 투기 광풍은 수 많은 개인들의 파산은 물론 나라의 미래도 짓밟았다. 네덜란드가 영국에 밀려 일류 국가로 전락한 이유를 건강한 노동보다는 손쉽게 돈을 벌려는 습성의 고착화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요즘은 튤립 수출로 연간 25억 달러를 벌어들이지만 네덜란드는 수백년간 후유증을 앓았다.

오싹한 대목도 있다. 예수 탄생 이후 지금까지 세계 경제의 성장률 그래프를 보면 튤립 투기 시대의 네덜란드 꽃시장의 주가 흐름과 일치한다. 17, 18세기 버블 셋 중 남은 두 개인 남해회사 버블과 미시시피 버블의 그래프와도 궤적이 같다. 379년전 오늘 정점을 찍고 급락한 네덜란드 튤립 투기는 현대 지구촌 경제에 대해 ‘지속 성장’을 중시하라는 경고장 격이다.

한국 경제가 지나온 길은 더 닮은 꼴이다. 아파트를 튤립 한 뿌리와 바꾸자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둘은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거품’이라는 이름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다. 부동산뿐이랴. 쉽게 돈 벌려는 풍토가 오랫동안 지켜온 가치관을 야금야금 파먹고 가족마저 무너져간다. 자본의 역사는 말한다. 돈과 이윤에 대한 맹종과 광기의 끝은 파국이라고.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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