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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말 서랍을 정리하다가 그동안 모아두었던 그림엽서 한 묶음을 찾았는데 그 중에 독특한 말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두운 마구간을 배경으로 선명히 대비돼 있는 백마의 모습으로 몇 해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피카소와 모던아트: 열정과 고독'전에 소개됐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말 그림, '백마 가젤(White horse "Gazelle")'이었습니다.
유명한 프랑스 인상파 화가 중 하나인 로트레크는 어린 시절 다리를 다쳐 하체의 성장이 멈추는 장애를 겪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무희와 말 타는 기수 등 많은 그의 작품에는 어두움과 건강한 생명력에 대한 갈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과거 이 작품에 대해 남겼던 감상을 다시 찾아보니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로트레크는 원래 활동적인 모습을 즐겨 그렸는데 이 그림은 조금 색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쇠빗장이 달린 나무문으로 보아 마구간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문 윗부분에 말이 물어뜯어 놓은 자국이 선명하다. 닫힌 마구간 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은 화가의 모습이 투영된 때문일까. 쓸쓸한 느낌이 화면에 가득하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작품을 보니 또 다른 사실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마구간 밖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가젤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높이가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이미 14~15세에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키 작은 17세 소년 로트레크는 가젤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기 어려운 상태였을 것입니다. 성인들조차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말은 키가 큰 편이기 때문입니다. 맞은편 어딘가에 올라가 걸터앉아서 바라본 모습일 수도 있지만 가까운 거리감으로 보아 작가는 백마를 마음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젤이 정면의 작가가 아니라 먼 곳을 응시하고 있기에 외로움이 절절히 느껴졌던 것입니다.
가젤(Gazelle)은 아름다운, 우아한 등의 의미가 담긴 아라비아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가장 잘 뛰는 동물, 영양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잘 뛰는 가젤이 마구간에 갇혀 있는 모습이야말로 장애의 몸에 갇혀 있던 로트레크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겠지요. 누구보다 말 타고 달리는 것을 사랑했던 소년, 로트레크의 상처 받은 마음을 함께 나누며 보듬어줬던 가젤의 모습이 오늘 유난히 더 환하게 느껴졌습니다. /김정희(말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