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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낳고 한참 귀엽기만 할 때도 문득문득, 아, 이 아이도 언젠가 군대에 가겠지, 막연한 공포가 밀려오곤 했었습니다. 저 작고 앙증맞은 발에 군화를 신을 날이 정말 올까싶었는데 생각보다 세월은 빠르더군요. 말 안듣던 청소년기에는 '군대를 가야 정신을 차리지'라며, 내가 못하는 아들교육을 국가가 빨리 엄하게 해주길 바란 적도 있었지만, 아들의 첫면회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울컥해집니다. 난생 처음 가본 철원의 겨울은 어찌나 추웠던지요.
벌겋에 얼어있던 아들의 얼굴과 터진 손을 만져본 그날 이후로 길거리에서 군인들만 봐도 마음이 쨘하고 미안해집니다. 정국이 조금만 불안해져도, 군대내 이런저런 사건사고만 터져도 심장이 뛰고 눈물이 나는건 아들을 군대에 보내본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의 같은 마음일겁니다. 그런데 고위공직자 중에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아들도 군대에 가지 않은 경우가 꽤 많더군요. 평범한 내아들, 내 주변의 아들들은 모두 군대에 갔는데 어쩌면 저렇게도 다양한 이유로 군대에 가지 않을수 있었던걸까요. 군대는, 전쟁은,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만 감당해야하는건가요? <25시>(1967년작, 콘스탄틴 게오르규 원작)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갖은 고초를 겪던 유대인도 돈있고 힘있는 사람은 탈출하고 살아남는데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 루마니아 시골의 이 힘없는 농부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인생이 갈갈이 찢기고맙니다.
모든 면에서 평범한 농부 요한 모리츠(안소니 퀸)는 아름다운 아내 수잔나(비르나 리지)를 탐하던 경찰서장의 모략으로 유대인강제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전쟁은 겉으로는 명분과 이념의 대립이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실질적 비극은 이렇게 개개인의 탐욕과 범죄로 얼룩져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라고 외쳐보지만, 당장 지금 죽는다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요한의 억울함에 관심을 갖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자 유대인의 탈출에 끼어 간신히 헝가리로 넘어오지만, 이번에는 '진짜 유대인'이 아니기에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우왕좌왕하던 요한은 스파이로 몰려 헝가리 경찰에 잡혔다가 독일로 끌려가 또 수용소에 갇힙니다. 전쟁에도 코메디는 있는건지, 그 와중에 요한은 가장 아리안족의 얼굴이라며 영웅으로 칭송받고 독일군 친위대로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일이 패망하고 요한은 전범으로 재판을 받지만 요한은 뭘 잘못한걸까요... 다행히, 8년간 요한에게 보낸 수잔나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풀려나, 낯선 기차역에서 가족들과 재회하는 요한. 그토록 그리워한 수잔나의 곁에는 소련군에게 겁탈당해 태어난 금발의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남편이 없는 10년 동안 수잔나가 겪은 고통도 요한 못지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죠. 때마침 나타난 사진기자가 스마일을 외치고, 착한 요한은 최선을 다해 어거지로 웃음을 만들어봅니다.
요한의 스토리만 억울하고 기구하진 않았을겁니다.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그 많은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스토리도 모두 영화로 만들 수 있을만큼 파란만장할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는 그 엑스트라입니다. 소중하지 않은 삶은 없기에 의미있는 전쟁은 없습니다. 평화는 엄청난 인내와 지혜를 요구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인 이유입니다.
조휴정 KBS PD (KBS1라디오 '생방송 오늘, 이상호입니다'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