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귀환하라.’
20년간 남파 간첩 신분을 숨긴 채 결혼까지 해 살던 기영. 잊힌 존재요, ‘끈 떨어진 스파이’로 대한민국 서울 시민의 삶을 살던 어느 날 ‘24시간 안에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남은 시간은 단 하루.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존재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이 연극으로 관객과 만난다. 국립극단과 프랑스 오를레앙 국립연극센터 공동 제작으로 3월과 5월 각각 한국과 프랑스 무대에 오를 이 작품에선 지현준이 간첩 김기영 역을 맡았고, 문소리는 그의 아내 장마리 역으로 6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다.
각색과 연출은 프랑스인 발레리 므레장과 아르튀르 노지시엘이 각각 맡았다. ‘분단’이라는 한국의 현실을 내부의 시각이 아닌 이방인의 시선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작업인 셈이다.
노지시엘 연출(사진)은 17일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열린 ‘빛의 제국’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역사적 사건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세대를 거치며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지를 보여주고 싶다”며 “이렇게 볼 때 빛의 제국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세계의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말했다. 각색 작업에도 참여한 그는 “공연시간이 2시간도 채 안 되어 소설의 많은 분량을 덜어내야 했다”며 “기영의 하루를 따라가는 큰 틀은 같지만, 어떤 부분에선 책에는 없는 내용도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허구 같은 현실과 현실 같은 허구를 넘나드는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배우는 작품 속 등장인물과 실제 배우 자신을 오가며 각자의 기억을 전한다.
평소 한국 소설이나 영화를 즐겨본다는 노지시엘 연출은 ‘지현준·문소리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먼저 캐스팅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광부화가들’ 이후 6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문소리는 “한국의 역사와 이 사회가 지닌 모든 것이 연결된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좋은 연출가와 동료가 함께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밤늦게까지 연출과 이야기를 나누며 ‘예전에 이런 시간을 더 많이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며 “무대에 돌아오면 아픈 것을 치료받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빛의 제국은 3월 4일~27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