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퐁’ 게임… 잡스에서 쪽박까지





1972년 11월 말 미국의 어느 선술집. 다트판과 핀볼 오락기가 놓여있던 바의 구석에 낯선 오락 기계가 하나 들어왔다. 호기심으로 다가간 젊은이가 25센트 짜리 동전을 넣으니 컴퓨터 화면이 떴다. 흑백 화면의 구성은 간단했다. 움직이는 것은 단 3개. 위아래로 움직이는 라켓과 점으로 표시된 공이 전부였다. 화면 상단에 표시되는 점수를 포함해도 눈에 보이는 것은 단 5개였지만 젊은이 뒤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엇보다 소리가 신기했다. 화면 속의 공이 라켓에 부닥치면 탁구 치듯 ‘퐁’하는 소리가 났다. 마침 미국과 중국이 ‘핑퐁 외교’로 관계를 개선해 탁구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터. 탁구공 소리를 내는 전자음이 신기했는지 청년 주위로 모여든 구경꾼들은 직접 게임을 즐겼다. 쉴새 없이 손님을 받았던 기계는 자정 무렵 꺼졌다. ‘게임기가 고장났다’는 항의를 받고 출동한 게임기 제작사 직원은 현장에 도착해 놀랐다. 게임기 속에 붙인 동전통이 가득 차 컴퓨터 작동이 정지됐던 것이다.

이튿날 더욱 큰 대박이 났다. 선술집의 주문이 잇따라 들어왔다. ‘퐁(Pong)’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임기의 가격은 1,200달러. 결코 낮은 가격이 아니었으나 퐁은 게임기의 대명사이던 핀볼(pinball)보다 4배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선술집 모퉁이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술집 주인들은 퐁이 벌어주는 수익이 많아지자 아예 업태를 바꿨다. 선술집에서 오락실으로. 오늘날 PC 게임방도 실은 퐁으로부터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퐁’은 비단 게임산업 뿐 아니라 막 태동하는 IT(정보 통신) 산업을 자극해 20세기 후반 이후 정보 혁명을 이끌었다. ‘퐁’을 세상에 알린 주역은 놀란 부시넬(Nolan Bushnell). 유타주립대학 재학 중 유원지에서 포커로 잃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공대생들의 장난감이던 전자오락을 실용화하면 돈을 벌 수 있겠다고 마음 먹은 지 7년이 지난 29세에 퐁을 선보였다.

퐁의 성공까지는 시련도 적지 않았다. 부시넬이 처음 주목했던 대상은 컴퓨터를 전공하는 대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스페이스 워’. 전산 시설을 갖춘 대학교에서나 즐길 수 있었던 스페이스 워를 보급형으로 만들어 1971년 ‘컴퓨터 스페이스’란 이름으로 출시했으나 쓰라린 실패를 맛봤다. 기능이 뛰어났어도 게임 규칙이 복잡했던 게 실패 요인. 평생 강조한 ‘좋은 게임이란 쉽게 배울 수 있되 마스터가 되기는 어려운 게임’이라는 ‘부시넬의 법칙’도 이때의 경험에서 나왔다.

단순하고 재미있는 게임을 찾던 부시넬은 남의 떡에서 해답을 찾았다. 대상은 세계최초의 가정용 게임기인 오디세이. TV 엔지니어이며 스튜디오 장비 개발자인 랄프 베어가 TV와 게임을 접목시켜 1966년 첫선을 보이고 1970년 상업화 모델을 내놓은 비디오 게임 ‘오디세이’의 ‘테이블 테니스’를 거의 베껴 ‘퐁’을 만들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나온다. 사운드의 유무와 라켓 접촉면의 세분화 외에는 오디세이와 크게 다를 것 없었던 퐁이 거둔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개방성과 다양화 전략 덕분이다. 혼자서 돈을 벌기 위해 특정회사(마그나복스)의 TV에서만 작동되던 오디세이와 달리 퐁은 소비자(선술집 주인)의 수익을 고려했다. 부시넬은 1974년 말에는 가정용 퐁도 내놓았다. 가격 100달러인 가정용 퐁은 대성공을 거뒀다. 어떤 회사의 TV에도 연결할 수 있는 가정용 퐁에 열광한 소비자 때문에 TV 브라운관이 타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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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의 대박 행진을 ‘특허권 침해’라며 분노한 마그나복스사는 소송을 걸었다. 법정 다툼 끝에 부시넬은 70만 달러의 라이선스 금액을 지불하고 독점 특허권(1974년 2월 19일) 사용자의 지위를 얻었다. 처음 내놓은 상업화 모델 ‘컴퓨터 스페이스’에서 실패한 뒤 친구와 함께 사업을 재개한 부시넬이 거둔 대성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퐁이 출시된지 4년 뒤인 1976년에 등장한 ‘Breakout’(블록 격파)는 게임장 주변 은행들의 동전을 고갈시킬 정도로 선풍을 일으켰다. 블록 격파는 따지고 보면 퐁의 변형판. 두 명이 필요한 퐁을 혼자 즐기면서도 긴장감과 몰입도는 훨씬 높아졌다. 벽돌담을 다 깨면 새로운 담이 나오고 마지막 벽돌이 남으며 공의 속도가 빨라져 이기기 여간 쉽지 않은 이 게임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벽돌깨기 게임 개발자 면면에는 놀라운 인물이 둘 나온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8비트 PC(개인용 컴퓨터)를 선보이고 휴대폰 제국 애플을 창립한 주역들이다. 글로벌 거대기업 애플의 역사에도 퐁으로부터 시작된 게임 시대가 담겨 있는 셈이다.

잇따라 대박을 터트린 부시넬은 블록 격파의 인기에 놀라 게임산업을 영화에 버금가는 미래산업으로 여겼던 워너 브러더스 영화사의 제의를 받고 1976년 회사를 넘겼다. 주식 매각 금액 2,800만 달러. 공동창업자금 500달러로 시작한 회사로 불과 5년 만에 5만 6,000배를 받은 부시넬은 아직도 다양한 사업에 투자하며 8명의 자녀와 함께 편안한 여생을 즐기고 있다.

부시넬이 세웠던 회사의 운명은 정반대다. 바둑을 좋아해 단수(單手·아다리)를 의미하는 ‘ATARI(아타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부시넬의 회사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영화사에서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후 잇따른 실패가 누적돼 1983년 발생한 ‘아타리 쇼크’에서는 미국의 게임산업 전체가 휘청거렸다. 연간 39억 달러 수준이던 시장 매출 규모가 1억 달러로 줄어들었으니까.

휘청거리는 미국 게임 산업의 빈자리는 일본 기업들이 꿰차고 들어왔다. 단순한 빈자리 차지가 아니라 탄탄한 실력을 갖춘 일본 업체들은 1979년 ‘스페이스 인베이더’ 개발 이후 전세계의 전자오락실과 PC 게임 소프트웨어를 움켜잡았다. 마치 바둑에서 ‘아다리’를 부르고 알을 따내듯이.

부시넬이 퐁으로 문을 연 게임산업은 여전히 성장산업이다. 지난해 세계 게임시장 매출 규모는 약 915억 달러. 전년보다 9.4% 성장이라는 고속 성장세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원화 기준으로는 108조 7,000억원으로 100조원 선을 처음 넘어섰다. 놓치기 아까운 시장이다. 게임은 중독 같은 부작용을 낳지만 성장의 동력을 제공할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방증하는 통계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가 창의력으로 반짝거리는 스티브 잡스나 부시넬을 길러낼 교육 환경과 사회적 합의를 갖고 있는가. 젊은 기업인이 창업 5년 만에 회사의 가치를 5만 6,000배 키울 수 있을까. 꿈같은 성공의 스토리는 저 멀리에 있고 게임 중독 같은 부작용은 눈앞인 현실이 안타깝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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