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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시험관이 세계를 뒤엎는다.' 이 말은 일제 치하, 과학기술을 통해 민족 역량을 일으키고자 했던 과학대중화 운동 '과학데이'의 표어이다. 1933년 4월19일, 제1회 과학데이 행사는 당시 언론의 뜨거운 관심 속에 시가행진까지 이어졌고 거리에는 홍난파가 작곡한 '과학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 행사는 비록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여긴 일제에 의해 단 5회 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암울했던 시기에도 과학기술에 거는 우리 민족의 뜨거운 희망과 기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약 30여년 후, 사그라들던 희망의 불씨는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통해 다시 점화됐고 지금 우리는 과학기술 50년의 위대한 여정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KIST는 이러한 우리 과학기술의 위대한 역사와 함께해왔다. KIST는 서구사회가 200여년에 걸쳐 일궈온 과학·산업혁명을 우리나라가 불과 50여년 만에 이뤄내는 시발점이었다.
하지만 2016년 현재, 경제침체와 성장절벽에 우리 국민은 또다시 힘겨워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경제 활력과 더 나은 삶, 미래사회의 위협에 대한 해답을 과학기술이 제시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제 KIST는 이러한 국민의 요청에 응답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지난 2월4일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KIST는 '미래 50년, 기적을 넘어(beyond MIRACLE)'라는 비전을 선포했다. 지난 반세기의 성과와 영광을 뛰어넘어 다시 한 번 기적을 만들고자 하는 필자와 KIST 가족 모두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이를 위해 KIST는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고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발을 내딛으려 한다. 많은 언론에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MIRACLE'은 단순히 '기적'의 의미를 넘어 미래 우리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꿀 소재·소자(Material), 정보(Information), 로봇(Robotics), 농업(Agriculture), 에너지(Carbon), 바이오(Life), 환경(Environment) 분야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고와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그간 우리가 잘 해왔고 익숙한 방식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사고를 받아들이고 인적·물적 자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개방과 협력이 핵심이다. 특정 연구기관과 대학의 연구팀이 아닌, 해당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국가대표 드림팀을 만들고 이들에게 맞춤형 지원을 해주는 방식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KIST 설립 당시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지는 칼럼을 통해 KIST가 다른 후발 개도국의 모델이 될 수 있을지에 의문을 품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사이언스지는 KIST 50년의 성과를 인정해 50년 전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칼럼을 필자에게 요청, 얼마 전 게재되기도 했다. 이제 KIST와 우리 과학기술계가 축적해온 소중한 지식을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KIST의 발전 역사를 대한민국만이 아닌 전 세계의 자산으로 활용해야 할 시기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KIST와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성공 역사는 그 어떤 선진국도 제시할 수 없는 차별화된 경험이기 때문이다.
지난 50년 KIST의 여정은 대한민국의 산업화라는 기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는 그 기적을 뛰어넘어 국민과 국제사회의 염원에 부응하는 새로운 여정을 준비해야 한다. 1971년, KIST 기공식을 앞둔 시점에 언론에 실린 'KIST 관계자들이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달라'는 내용의 기고문이 새삼 떠오른다. 앞으로 또 다른 50년 후, 우리 국민들이 과학기술 100주년을 더 많이 축하하고 기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기적을 넘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병권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