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흑인의 눈물, 백인의 돈과 전쟁… 조면기





건국에서 남북전쟁까지 미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을 단 한 명만 꼽으라면 누굴까. 역대 대통령들과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기억되는 알렉산더 해밀턴, 76명에 이르는 역대 미국 재무장관 가운데 가장 긴 12년 9개월 동안 봉직한 앨버트 갤러틴 등의 쟁쟁한 인물들을 제칠만한 인물이 있다. 엘리 휘트니(Eli Whitney).


휘트니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서부 개발이 지연되고 남부 면화농장주들의 풍요가 없거나 늦춰질 수 있었다. 휘트니는 사후에 벌어진 남북전쟁의 향배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어도 흑인 노예들의 삶도 휘트니의 발명 하나 때문에 더욱 비참해졌다. 도대체 무엇을 했길래. 두 가지 굵은 흔적을 남겼다. 조면기와 부품호환 시스템.

조면기부터 살펴보자. 메사추세츠의 농부 집안에서 1765년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두들기고 만드는 재능이 많았다. 어머니를 여윈 11세부터는 작업실에 틀어 앉았다. 시장의 흐름을 읽는 눈도 밝았는지 독립전쟁의 와중에 못이 부족하자 소년 휘트니는 아버지를 설득해 못을 제작하는 대장간도 만들었다.

직원을 고용할 만큼 번성한 못 공장을 뒤로 하고 다소 늦은 나이에 예일대에 진학해 법을 공부한 휘트니는 남부를 여행하던 중 독립전쟁의 영웅인 그린 장군의 미망인 집에 머물며 면화 농장을 처음 접했다. 당시 남부 농가들의 최대 고민은 판로 개척. 독립전쟁 뒤부터 인디고(염료)와 담배 등을 수입하던 영국으로부터의 주문이 끊겨 대체 작물과 새로운 시장이 절실해졌다.

농장주들은 북부와 동부에 들어서기 시작한 방직 공장에 납품할 면화에 주목했으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당시 미국 면화의 주종은 솜이 긴 ‘장융면(長絨綿). 이집트면 또는 해도면으로 불리던 이 품종은 모래 토양이 필요해 바닷가나 섬, 강가에서나 자랐다. 육지면은 생장기간이 짧은 데다 재배도 까다롭지 않았으나 씨 빼기가 문제였다.

이집트면의 씨는 기원전 200년께 인도에서 발명됐다는 롤러로 간단하게 빼낼 수 있었으나 육지면의 끈적 끈적한 씨는 섬유질에서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젊고 건장한 흑인 노예가 하루에 130㎏, 어린 아이도 45㎏의 목화솜을 딸 수 있었으나 육지 면의 씨앗이 단단하고 질기며 끈적끈적해 하루 처리량은 0.5~0.8㎏에 불과했다. 1784년에는 어렵사리 영국 수입상을 구슬려 미국산 면화를 영국에 첫 수출했으나 ‘미국에서 면화를 수출했을리 만무하다’고 의심하며 통관을 늦춘 영국 세관 때문에 미국의 면화가 리버풀의 부두에 방치된 채 썩은 적도 있다.

기대도 컸지만 난관은 더 컸던 미국의 면화산업은 미망인의 농장에 머물던 휘트니가 ‘조면기(Cotton Gin)’를 발명한 이후 순풍을 맞았다. 1793년 3월 14일 특허를 얻은 기계구조는 간단했다. 판자와 크랭크축, 크고 작은 원통형 밀대, 벨트가 전부. 조면기는 노예의 1인당 생산성을 뛰게 만들었다. 30~50명이 들러 앉아 씨를 빼던 작업을 한 사람이 해치웠다.

대량 생산된 솜은 영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영국은 미국산 목화로 만든 의류를 전세계에 뿌렸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고 산업혁명의 위력을 실감한 각국이 산업화에 나선 것도 이 무렵이다.* 목화나무 재배가 돈이 되자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휘트니의 조면기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흑인 노예에 대해 북부보다 더 동정적이던 남부 농장주들은 노예를 생산요소로 여겼다.

노예제도 폐지론은 쏙 들어가고 수탈과 인권 말살, 지독한 인종 차별이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인간의 노동력 가격도 뛰었다. 목화를 따는 흑인 노예는 곧 돈이었으니까. 1790년 평균 300달러이던 노예 가격은 1850년 2,000달러로 뛰었다. 노예 수는 65만명에서 320만명으로 불어났다. 경제주도권과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 결국 사상자 97만여명을 낸 남북전쟁으로 번졌다.


조면기 발명부터 남북전쟁 직전까지 미국 면화산업은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커나갔다. 1793년 미국의 면화 생산량은 225만㎏. 세계 생산량의 1%에도 못미쳤으나 1860년에는 9,000만㎏으로 불어났다. 전세계 생산량 점유율도 70% 이상에 이르렀다. 하얀 인간 중심의 미국 남부는 검은 인간들이 흘린 눈물에 젖은 하얀 목화솜 덕분에 풍요를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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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파급 효과를 낳은 조면기를 발명한 휘트니는 돈을 벌었을까. 반대다. 마음만 다쳤다. 불법 복제 탓. 농장주들은 이익의 일정액을 원하는 휘트니와 그 동업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직접 만들어섰다. 숙달된 목수라면 불과 십수 달러의 재료비로 반나절이면 제작할 수 있는 간편한 구조가 역으로 돈을 버는 데는 실패를 안겨 준 셈이다.

휘트니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특허 소송에 넌덜머리를 냈으나 얻은 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돈과 인맥. 우선 10만 달러가 생겼다. 로열티가 아니라 주 정부들이 제공한 일종의 보상금이 모인 돈이었다. 사우스캘리포니아주 정부가 특허권 침해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지급한 5만 달러, 노스캐롤라이나주가 면화에 부과한 세금의 일부를 떼어내 준 3만 달러, 테네시주도 1만 달러….

결코 적지 않은 자금을 가지고 휘트니는 다른 사업에 눈을 돌렸다. 물색한 끝에 결정한 게 총기 제작업. 경험도 자금도 없었으나 휘트니는 자신이 있었다. 정부의 소총 발주에 당당히 뛰어들어 1만 여정의 물량을 따냈다. 정치권 인맥이 결정적으로 휘트니를 도왔다. ‘미국 태생인데다 대학까지 나온 젊은 발명가’를 반겼던 신생 미국의 정치인 중에는 해밀튼 재무장관과 재퍼슨 국무장관도 있었다.

조면기를 발명하고도 제대로 로열티를 가져가지 못한 젊은 발명가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인지 미국 정부는 쉽게 소총 물량을 내줬다. 소총 사업에서 휘트니는 운도 좋았다. 마침 유럽을 휘젓는 나폴레옹이 언제 군대를 몰고 북미 대륙을 침입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미국 정부는 소총을 발주하고 그 물량을 휘트니가 따냈다.**

휘트니는 계약 불과 2년 만인 1980년 물량 납품을 마쳤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숙달된 장인을 보유한 총기 회사들의 연간 생산량은 500~700정 하던 시절, 연 5,000정씩 생산한 비결은 부품 호환. 총의 모든 부품을 장인이 하나 하나 만드는 게 아니라 장인은 기계도구를 사용해 대량생산한 부품을 비숙련공이 조립하는 방법으로 생산 수율을 극대화로 끌어올렸다. 일하느라 나이 51세가 되서야 유력 집안의 20세 연하 신부와 결혼한 그는 결혼생활을 9년만 누리고 60세 나이로 죽었다. 휘트니가 남긴 1남 2녀(원래 3녀 였으나 막내딸은 출산 중 사망)의 후손들은 널리 퍼졌다.



휘트니가 납품한 소총의 성능을 반신반의하는 국방성 관리들 앞에서 그는 박스 두 곳에서 10여 자루의 총을 꺼내 분해하고는 부품을 섞어놓은 후 재결합하는 이벤트까지 펼쳤다. 휘트니에 의해 북부의 총기생산이 규격화하며 호환성을 확보한 반면 이렇다 할 제조업이 없었던 남부는 나중에 총기공장을 만들면서도 규격화에 실패, 결국 전투에서 소총의 성능 차이로 나타나고 패배의 원인의 하나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휘트니의 소총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 않은 가운데 존 스틸 고든 등 주류 경제사가들은 휘트니의 부품 호환성 확보를 ‘미국식 생산 양식의 원형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다. 휘트니의 부품 규격화가 휘트니 2세가 운영하던 공장 일부를 빌려 무기사업을 시작한 사무엘 콜트를 통해 보다 발전하고 헨리 포드에 이르러 대량 생산 시스템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경제사가들의 분석이 맞다면 오늘날의 세계의 공장은 대부분 포드식 생산시스템이니 휘트니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셈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휘트니의 조면기는 인도와 중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원료의 공급지이자 생산지로서 발전한 반면 인도와 중국의 목화산업은 쪼그라 들었다. 의류산업의 역사를 거울 삼아 세계경제사를 설명한 책 ‘티셔츠 경제학’에서 피에트라 리볼리 조지타운대 교수는 왜 미국에서 면화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에 주목한다. 중국이나 인도, 이집트에도 흑인 노예와 비슷한 처지의 농노가 존재했는데 혁신이 미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발명과 생산성 향상이 나의 몫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동기 부여 덕분이라는 것이다.

** 나폴레옹은 실제로 북미 대륙을 침공할 생각이 있었다. 1791년 생 도밍고 설탕 농장의 흑인노예들의 의한 봉기를 즈음한 프랑스는 초기에는 봉기 지도자 투생 투베르튀르에게 육군 소장 계급장 수여하며 회유하다 1801년에는 병력 4만 6,000명을 보내 진압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투생을 생포해 송환했으나 흑인 봉기군은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1805년 중남미 최초로 독립을 선포했다. 나폴레옹은 생 도밍고 반란을 단숨에 정리하고 북미로 진군해 미주 식민지로 삼아 ‘제 2 프랑스’를 건설할 생각이었다. 미국은 생 도밍고 흑인 봉기의 덕은 크게 본 셈이나 58년간 이 지역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 휘트니가 ‘아메리칸 시스템의 아버지’라는 해석에 대해서도 약간의 이론이 있다. ‘신화가 된 기업가들-타이쿤’을 지은 찰스 모리스는 ‘부품 호환성은 휘트니와 그 자손들이 만든 허상일 뿐 실은 프랑스에서 시작됐고 미국에서는 존 홀이라는 총포제조업자가 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여러 정의 총을 분해해 부품을 섞은 후 결합하는 시범도 휘트니 사후 9년이 지난 1834년 존 홀이 처음 시연했다고 모리스는 주장한다. 모리스에 따르면 국방 분야에서 미국이 완전하게 부품 호환성 확보에 나선 시기는 모건 금융가문이 자금을 대기 시작한 이후다.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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