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일벌백계(一罰百戒)가 필요한 사회





1989년 크리스마스 날,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세스쿠가 공개총살을 당했다. 김일성과 손을 맞잡고 정면으로 사진을 찍은 몇 안 되는 지도자 중 하나였다. 그가 부인과 함께 사형당하는 영상, 사진이 지금도 온라인 공간 곳곳에서 떠돌아 다닌다. 독재자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 잠깐 동안 전세계 학계에 논쟁이 일었다. 민주 정부의 이름으로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온당할 수 있지만, 그의 최후(最後)를 낱낱이 백일하에 공개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고 말이다. 공개 처형은 일반적인 민주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최고형(capital punishment)의 형태라고 보기 어렵다. 북한이나 아랍권 몇몇 나라에서 성행하고 있는, 끔찍한 대중 통제 행위에 가깝다. 독재를 청산한 민주 정부가,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폭력적 권력에 종언을 고했다는 역설은 아직까지도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최근 부모가 자식을 죽인 ‘원영이’ 사건을 보면 무도한 자들에게는 자비 없는 민주주의의 서릿발을 맛보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래로 우리나라의 사형제도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져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형법상 사형제는 존속하고 있지만 15년 이상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사실상 사형제 폐지 국가로 분류된다.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점점 심리적 저항선이 둔화되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말이다. 실제로 살인범들의 심리에 대해 인터뷰 해본 경험이 있는 학자들은 그들이 죄를 저지르는 순간, 도덕성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 정지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성의 끈으로 행동을 제어하지 않고, 자아(自我)가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려 가게끔’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 쾌감을 남녀간의 통정(通情)에 비유한 자도 있었단다. 얼마 전에는 문신을 새길 때마다 여자를 죽이는 흉악범을 다룬 영화에서 기가 막힌 대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럴 때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이다. 누군가를 죽이는 게 본능이고 욕망인 자들에게 우리는 인권과 자비의 이름으로 선정을 베풀 필요가 있는 것일까. 네티즌들의 말대로 공짜 밥을 먹여가며 안전한 수용 공간에서 평생 살도록 허락해도 좋은 것일까. 국가는 때때로 이처럼 막장 본성을 가진 자들을 위해 어떤 제도적 처방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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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흉악범이 있는가 하면, 법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자신과 묶인 자녀를 죽이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종자(種子)들도 있다. ‘원영이 사건’의 주범인 신원영 군의 친부와 계모 말이다. 계모가 자녀를 괴롭히는 이야기가 우리 문학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모티브라지만, 따지고 보면 생모 못지 않게 가까운 존재다. 정은 없더라도 그 인연을 가벼이 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짐승에게도 하지 않는 행동을 했던 그들에게 우리는 사실상 무기징역 외에 다른 극단적 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게다가 현행 형법은 존속살해(부모 또는 조부모)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나 원영이 사건과 같은 비속살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일반 살인죄와 동일하게 처벌한다. 명나라의 헌법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행위에 대해서는 능지처참(陵遲處斬)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지금 우리 법리가 군주 독재 사회의 그것보다 못할 때가 있음을 느낀다.

억울하게 죽어간 원영이의 원령(怨靈)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잔악한 자들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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