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1월30일 부산 국제시장. 추운 겨울 누군가 내다 버린 연탄재 불씨가 바람을 타고 건물에 옮겨붙었다. 당시 국제시장은 목조건물 12개 동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피난민들이 지은 판잣집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피난민들이 먹을 식수도 없는데 화재를 진압할 물을 구하기란 불가능했고 결국 불은 국제시장 전체와 신창동·부평동 등 일대를 전소시켰다. 이 화재로 그러잖아도 피난민이 돼 고생하던 사람들은 이재민까지 돼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피난수도 부산은 갑작스러운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난 수많은 사람이 처절하게 삶을 살아낸 곳이다. 전쟁이 끝난 뒤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에서 ‘잘 가세요 잘 있어요’ 하며 고향에 돌아갔지만 그 삶의 흔적은 아직도 부산 곳곳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동역에서 내리면 계단 개수가 40개라고 해서 이름이 그렇게 지어진 ‘40계단’이 보인다. 피난민들은 이곳 주변에 모여 미군의 구호물자는 물론 일자리까지 얻어 생계를 꾸렸다. 그들은 이곳에서 낮에는 영도다리를 바라보며 피난살이의 고달픔을 나누고 밤에는 부산항에 정박해있는 배들이 밝히는 불빛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랬다.
감천마을과 비석마을도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지어 정착한 이른바 달동네다. 산 중턱에 집들이 계단식으로 뿌리내린 감천마을은 오늘날 한국의 마추픽추라고 불리는 부산의 관광명소가 됐다. 일본인 공동묘지 자리에 조성돼 그렇게 명명된 비석마을은 비석이나 상석이 옹벽 또는 가파른 계단의 디딤돌로 쓰이거나 집의 주춧돌로 사용돼 치열했던 피난생활을 엿보게 한다.
그 어렵던 시기에 피난민들은 어묵으로 배를 채웠다. 어묵은 전쟁 통에 피난민들에게 값싸고 배부른 최고의 영양식으로 인기를 끌었고 이후 부산어묵은 국가대표 어묵으로 자리 잡았다.
부산시가 국비·시비 등 모두 8억원을 들여 ‘피난수도 부산 야행(夜行)’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부산시는 임시수도 청사(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임시수도 대통령관저(임시수도기념관) 등 피난수도 관련 문화재 33건을 포함한 문화 콘텐츠를 하나로 묶어 그 시절을 재현한다고 한다. 66년 전 피난수도 부산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벌써 마음이 설렌다.
/한기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