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먹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 사람을 죽인 대학생이 ‘만취 상태였다’는 이유로 법원의 선처를 받았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19세 청년을 치어 죽이고 도망친 범인도 ‘음주 감경’이 적용돼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최근 ‘술 봐주기’ 판결이 계속되면서 음주 감경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지만 제도 개선을 해야 할 법무부는 손을 놓고 있어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달 창원지법 진주지원 형사1부는 살인과 살인미수죄 등으로 기소된 강모(23) 씨에게 심신미약 감경을 적용,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강씨는 지난해 8월 19일 친구들과 4시간 가까이 술을 마셔 만취 상태가 됐다. 친구들이 “술을 더 먹자”는 말을 무시하고 가 버리자 화가 난 강씨는 한 단독주택에 침입해 자고 있던 60대 부부를 무차별적으로 칼로 찔렀다. 남편은 즉사하고 아내는 전치 3주의 부상을 당했다.
법원은 “죄질이 극히 불량하고 사회적으로도 위험성이 크다”면서도 술에 취해 범행을 저지른 점을 참작했다. 길을 걷다 어깨를 부딪혔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여 올 1월 25년형을 선고 받은 마모씨, 묻지마 살인으로 1명을 죽여 지난해 11월 20년형을 받은 라모씨 등 사례와 비교하면 음주 감경의 효과가 뚜렷하다.
지난달 청주에서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판결이 나왔다. 청주지법 형사1부는 2월 19일 혈중알코올농도 0.211%로 만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다가 뺑소니 사망 사고를 낸 임모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던 1심을 깨고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판결은 상고가 이뤄지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특히 2심 재판부는 임씨에 심신미약 감경을 적용했다. 한문철 교통 전문 변호사는 “음주운전과 그로 인한 인명 사고는 사전에 범행을 예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심신미약 감경을 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담당 재판부는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대법원이 살인범에 음주 감경을 인정한 사례도 있다. 지난해 5월 대법원은 술에 취해 이웃을 70회 이상 칼로 찔러 살해한 이모 씨에 대해 16년형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1심은 “이씨가 범행 과정을 자세히 기억하는 것을 볼 때 심신미약이라 볼 수 없다”며 18년형을 선고했으나 2심은 심신미약을 인정해 형을 2년 깎아줬고 대법원도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서기호 정의당 의원은 “심신미약 감경 규정의 입법 취지는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정신질환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스스로 술을 먹고 취한 사람까지 보호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라며 “음주 감경은 국민의 법 감정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국민 정서와 맞지 않는 음주 감경 판결이 계속되는 이유는 1차적으로 법원의 술에 대한 관대한 경향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제도의 허점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나라 형법 10조 3항은 ‘범행을 예견하고 자의로 취한 경우’는 심신미약 감경을 하지 않도록 제한하고 있다. 범행할 목적으로 술에 취하는 경우나 음주 운전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만취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한 경우는 제한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주취 범죄가 우발적으로 이뤄지는 점을 고려하면 법에 구멍이 뚫려 있는 셈이다.
반면 독일·스위스 등은 만취 우발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명정죄’라는 규정을 따로 두고 있다. 독일은 명정죄를 저지르면 징역 5년 이하에 처한다. 더 나아가 미국은 ‘모범형법전’에 “만취 상태를 자초했을 경우엔 항변이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판례상으로도 ‘주취는 범죄의 변명이 될 수 없다(Drunkness is no excuse for crime)’는 원칙이 확고하다고 한다.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독일과 같은 명정죄 도입 등 음주 감경을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제도 개선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음주 감경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자 지난해 11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당시 김주현 법무부 차관(현 대검찰청 차장)은 “다음 회의 때까지 개선안을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법무부는 지금까지도 “연구 검토 중”이란 말만 반복하고 개선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