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로 평가받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지금도 1순위 인기 대통령으로 꼽히는 로널드 레이건을 배출한 162년 역사의 미국 공화당이 요즘 말 그대로 ‘멘붕’ 상태다. 대선 후보 경선에 혜성처럼 나타난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후보 지위를 굳혀가고 있어서다. 인종차별적 막말은 기본에 과격한 외교정책을 일방적으로 떠드는 그를 공화당 지도부가 작정하고 낙마시키려 할수록 트럼프 열풍은 거세지는 양상이다. “트럼프만이 트럼프를 이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다.
트럼프 신드롬은 공화당에서 다수지만 소외됐던 중산층 이하 백인들이 트럼프를 새 희망으로 본 것에서 출발했다. 특히 대통령을 두 번 한 조지 부시 가문의 차남이 초반 탈락하고 현직 상원의원과 주지사들이 줄줄이 경선을 포기하거나 군소 후보로 전락한 데서 보듯 미 전역의 유권자들이 ‘워싱턴DC의 그들만의 정치’에 극도의 배신감과 불신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된 배경이다.
아웃사이더 돌풍은 민주당 내 소수파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경선을 거듭하면서 예상을 훨씬 넘는 지지를 끌어내며 가세했지만 20여년간 퍼스트레이디와 상원의원·국무장관을 지내며 워싱턴 정치 자체가 된 힐러리 클린턴의 벽을 넘지는 못할 것 같다. 샌더스보다 뛰어난 대중 흡입력에 무엇보다 기존 정치의 틀을 뛰어넘는 데 탁월한 트럼프지만 미 주요 언론은 본선 무대에서는 그간 트럼프의 온갖 괴물 같은 발언과 행동이 부메랑이 돼 클린턴이 어렵지 않게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경력만큼 국무장관 시절 e메일 스캔들 등 흠이 많은 클린턴의 약점을 트럼프가 특유의 독설과 공격력으로 파고들면 또 한 번 미 대선 판세는 예측불허가 될 수 있다. 트럼프가 스스로 판 함정에 걸려 낙선하든 또 한 차례 변신으로 백악관의 새 주인 자리를 예약하든 오는 11월8일 제45대 미국 대통령을 뽑을 때까지 스포트라이트는 클린턴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릴 것으로 보인다.
미 대선 레이스는 다음달 총선에 이어 내년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도 한국판 트럼프가 나올지 생각해보게 한다. 사실 워싱턴 뺨을 후려갈길 여의도 정치의 후진성에 경제까지 미국보다 안 좋은 상황을 감안하면 제2의 트럼프가 한국 정치에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을 예측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미 4년 전 기업인 출신의 ‘착한 트럼프’가 등장해 단숨에 국민적 기대를 모았지만 이제는 그저 그런 기성 정치인 중 한 명이 된 경험도 있다.
여야 모두 올해 말 임기가 끝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여의도의 신데렐라로 만드는 데 관심이 큰 듯하다. 반 총장이 유엔 사령탑에서 금의환향하면 기존 정치와 다른 변화와 혁신을 이끄는 ‘훌륭한 트럼프’가 되기를 바라지만 결과는 예단하기 어렵다. 전혀 생각지 못한 또 다른 트럼프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단순히 포장만 다른 트럼프들이 대권 무대에 홀연히 출현하는 현상은 앞으로도 우리의 정치 현실과 시스템에 숙명인 것일까. /runiro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