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통일·외교·안보

臨政 법무총장 오영선 선생 '4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국가보훈처가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임시정부 오영선 선생. 선생은 지난 1922년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라는 글을 기고하고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이미지 제공=국가보훈처국가보훈처가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임시정부 오영선 선생. 선생은 지난 1922년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라는 글을 기고하고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이미지 제공=국가보훈처




‘4월의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을 지낸 석농 오영선(사진) 선생이 선정됐다.

선생은 부부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둘째 사위다. 경기 고양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 정세에 눈을 떴고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지난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장교의 꿈을 접었다.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돼 퇴학 처분을 받고 귀국한 선생은 1909년 캐나다 로버트 그리어슨 선교사가 함북 성진에 세운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일제의 강제 병합 후 북간도로 이주해 독립군 장교 등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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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기습 공격해 한인 주민 상당수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선생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긴 후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돼 이동휘 국무총리를 보좌했다.

선생은 1922년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라는 글을 기고하고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1924년 12월 박은식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총장으로 선출돼 정국 쇄신을 위한 헌법을 개정했다. 정의·신민·참의 3부를 설득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합의를 끌어냈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주장하다가 1939년 상하이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도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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